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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균열
보신각(普信閣) 종(鐘)이 깨져 있다는 것은 시인(詩人)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사실입니다. 몇해 전부터 나는 종(鐘)에 가지고 시를 써 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던중 이 종(鐘)이 왜 균열이 생겼는가 궁금하게 여겨본 일이 있습니다. 원래 종(鐘)은 깊은 산중(山中)에서 나무와 숲에 싸여 사념의 테두리를 짓고 감은 눈을 더 안으로 감아버리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첩첩산중에 있는 종(鐘)일수록 그 소리는 맑고 넓게 퍼져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종(鐘)은 그것을 모시는 종각(鐘閣)이 목성(木性)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900년대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보신각(普信閣)은 비록 낡기는 했지만 자그마한 목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후 현재의 보신각(普信閣)은 외형만 원형대로 복원되었지 재료는 시멘트가 대부분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그 주변 종로 네거리의 건물들도 한결같이 콘크리트입니다. 더군다나 가서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보신각(普信閣)의 기둥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기둥들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놈의 종(鐘)이 옛날과 같이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콘크리트 기둥 때문이요 그 주변 빌딩벽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놈의 종(鐘)은 한번 댕, 하고 울면 그 소리는 멀리 은은하게 퍼져가기는 커녕 사방 콘크리트 기둥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낸 소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으로 콘크리트에 부딪혀 되받아 나오는 소리의 충격으로 인해 종(鐘)은 균열이 갑니다. 즉 저놈의 종(鐘)은 제가 낸 소리를 콘크리트 기둥에 의해 제 스스로 받으며 그 충격으로 제 몸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소리로 스스로를 처형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처한 모습인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내가 쓰는 시도 이와 별다름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지 위에 불빛을, 민족문학사, 1985
조정권 시인 / 근성(根性)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뿌리들이 여지껏 흙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우리만큼 흙의 혈(血)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 흙의 육(肉)을 물어뜯고 있었나보다 이놈들은 흙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하반신(下半身)을 스스로 잘라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육(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김달진옹(金達鎭翁) 1
어느 노(老)스님의 만년(晩年)처럼 마른 향(香) 대청 마루 같은 마음이 여기 있구나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노래 2
생각나는가. 엄동설한에서 익힌 향기로운 벼이삭을 한아름 품에 안고 너는 아침마다 시장으로 간다 점심때에도 시장으로 간다 저녁때에도 시장으로 간다 장터에는 눌러 놓아도 막아 놓아도 외쳐지는 네 입이 있다 눌러 놓아도 막아 놓아도 열려지는 네 입이 있다 입을 지운 자리에 다시 입이 생기고 눈을 지운 자리에 다시 눈이 생기는 네 얼굴의 포스터가 거기에 있다. 생각나는가. 장터에서는 큼직한 손이 갈 길의 덜미를 나꿔채서는 너를 땅바닥에 자빠뜨린다. 너는 아침에도 자빠지고 점심때도 자빠지고 저녁때도 자빠진다. 너아침에도 죽고 점심때도 죽고 저녁때도 죽는다. 너를 찾아다니는 죽음은 갑옷을 입은 병사다. 너를 찾아다니는 죽음은 어김없이 너를 땅바닥으로 데려간다.
벽은 우리들의 고향이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벽은 우리들 중 아무도 당도해보지 못한 밤이고 아무도 도착해보지 못한 시간이다. 너는 아침이 되어도 밤을 맞으러 나가고 오후가 되어도 밤을 맞으러 나간다. 너는 저녁이 되어도 밤을 맞으러 나가고 자정이 넘어도 밤을 맞으러 나간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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