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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태일 시인 / 파도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4.

조태일 시인 / 파도처럼

 

 

나아가다 밀리고 나아가다 부서질지라도

노래 위에서 함성 위에서 출렁이다가

벙어리로 벙어리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누울지라도 누울지라도.

 

나아가다 불붙고 다시 나아가다 타오를지라도

모두 모두 나아가 한줌 재로 날리다

무덤 위에 무덤 위에 내려앉아

잠들지라도 잠들지라도.

 

그날의 무덤은 그날의 세상은

홀로 홀로 밝혀 파도치듯 파도치듯

살아날 것이로되 살아날 것이로되.

 

사월이여 들끓어다오

무덤이여 들끓어다오

다시 나아가다 무덤이 되고

 

다시 돌아오다 무덤이 되고

끝내 돌아와 고요한 무덤으로

누울지라도 누울지라도.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풀씨에서 백두산까지

 

 

드러누워도 엎드려도 보인다

눈감아도 보인다

밤낮없이 보인다.

 

풀씨에서 백두산까지

백두산에서 풀씨까지

그 거리도 그 크기도

우리들 눈으로 들어와서는

한몸으로 껴안는다.

 

작은 마음 큰 마음

한마음으로 어우러져

풀씨의 마음 백두산의 마음

작은 가락 큰 가락

한가락으로 춤판 벌여

풀씨의 가락 백두산의 가락!

 

이 땅 눈곱만해서

이 백성 갈라져서

큰 정신 큰 문학 없다 푸념하며

누가 돌아서는가

주저앉는가

입 다무는가

저놈의 꼬락서니!

 

실개천은 강에서 모인다

강은 바다에서 모인다

함께 밀리면서 끝내 밀며 나아간다

수평선을 무너뜨리며

나아간다.

 

티끌은 낮은 데서 모인다

낮은 데서 높아간다

함께 높아가면서 끝내 태산이 된다

하늘을 찌르며

높아간다.

 

실개천이여

티끌이여

풀씨여

산이여

하늘이여

 

우리 한 품안에

하나 되어

한 마음 열 마음 되어

열 마음 한 마음 되어

 

어디고 없이

언제나 없이

풀씨의 마음에 가득 차는 백두산

백두산의 가슴에 어리는 풀씨들.

 

드러누워도 눈감아도 밤낮없이 보인다.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조태일(趙泰一. 1941년-1999년) 시인

전남 곡성 출생.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문학 석사학위(1985), 박사학위(1991)를 받음.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4년, 시 〈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킴.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 및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됨.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1999 예술대학장을 역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 등을 펴냄.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 1991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2년 편운문학상, 1993년 성옥문화상, 1995년 만해문학상을 받음.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