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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비무장지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4.

이하석 시인 / 비무장지대

 

 

시월, 철원평야 가로질러 청둥오리 떼 남으로

날아온다, 철조망에 푸른 그림자 걸려 퍼덕이며.

걸린 그림자 미쳐 못 건진 채 새들 날아가고,

쇠들만 널린 들판, 쇠 조각들 밤마다 일어나

그 그림자들 찢어 놓는다.

이윽고 새들 울음 긴 포물선으로 남은 채

얼어붙는 하늘 밑 들판은 살 비비는 풀들 짓이기며

엎어져 버린다. 한꺼번에 큰 겨울이 오고

포탄의 심지 파고 들며 흙들 속 뻗어 나오던

풀 뿌리들 다리 오그리고, 자욱이 씨앗 날리던

하늘 북풍에 날아가고, 쟁기와 낫 사라진 들판,

철새들 그림자만 어지럽게

널려 마른 풀들이 덮는다.

 

녹슨 철조망 새로 보수하는

봄. 청둥오리 떼 아득히 가는 북쪽 하늘,

철조망에 걸려 새로 칠한 페인트 묻은 푸른

그림자들 퍼덕거리고, 들판을 기어가는 풀 뿌리 지뢰 밟아,

흙들 싹트는 씨앗 움켜쥔 채

공중으로 흩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비밀

 

 

그 나무는 신의 모습으로 서 있었네.

─모든 나무는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해 뜰 무렵 출근길에 인도와 차도 사이, 아슬아슬하게,

나무의 서쪽으로 드리운 그 그림자에

내 그림자의 가슴을 맞추었네.

다른 사람들이 버스가 오나 하고

동쪽으로 목을 뺄 때에,

슬쩍.

 

그게 `일치'라는 암호를 쓰는

내 비밀이네.

여러분들도 도시인이라 물론 많은 비밀을 가졌을 테지만.

 

해질 무렵 버스에서 내려

동쪽으로 뻗친 그 나무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몰래 맞추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붐벼

또 뒤섞였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서시

 

 

우리가 갈 곳을 지우며

안개가 검게 흰 진창 위로 피어

오른다. 먼 데로 도주하는 마음이

돌아보는 밤.

 

꼭두새벽에 돌아온다.

진 데를 빠져나와 비로소 잠 밖으로 몸을 털 때

우리의 길을 지우는 찬밤의 흰 꼬리가

아침해가 내린 그물에 휘감기는 게 보인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세 사내

 

 

대구 변두리, 토지 구획 정리 작업장의 한 구석,

세 사내가 불을 쬐고 있다.

서리의 한 끝, 날카로운 마른 풀들 부서진 길 가에서

판자조각들은 붉은 불길 솟구치며 타오른다.

기침이 한 사내를 폭풍 속 전나무처럼 흐트러놓는다.

또 한 기침은, 자신이 키운 낯익은 둔덕 쪽으로 번지는

불을 발끝으로 지우는 또 한 사내를 빈 깡통처럼 굴린다.

그리고 또 한 사내는 말 없이

분할된 들판길을 건너오는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켜뜬 채.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순례 1

 

 

어디에서든 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세상에는 온통 부러지고 망가진

길들뿐. 기름과 석탄 사이를 걸어서

졸면서 또는 기도하는 몸짓으로

어두운 어깨만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먼지를 덮어 쓴

풀들은 깡통들의 투명한 표정들을 감추고 있고,

바람이 나무둥치를 흔들 때, 나무들

쇠 껴안은 붉은 뿌리에서부터 쓸쓸해지고.

머리에 구름과 모래를 인 사람들이

나무 뿌리들이 감춘 물 속으로 그림자 던지며

지나갔다. 그들은 깡통과 비닐을 비껴 흐르는

길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기름들을 쏟고

깡통들을 풀밭에 던졌다. 그들은 스스로 흩으러 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

 

인간들이 지나간 들판에 버려진 채로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들만이 남아

어느덧 신성한 기운에 싸여 갈 뿐.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순례 2

 

 

바다 밑 빈 병들 서걱거리는

바위 틈으로도 인간들은 웅성거리며

지나갔다. 모래를 껴안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병들, 인간들의 말과

몸짓들과 신성을 게워 내며.

 

미역들은 초록의 몸을 바닷물에 풀어

모든 길들을 인간 쪽으로 열었다. 그 길을 떼지어 걸어

그들은 바다를 열었다, 몇 개의 쇠들을 흘리며

고통과 안식을 꿈꾸며. 말미잘의 동네 어귀

또는 꽃게의 마을 어귀에는 동전과 고무줄과

팬티 천 조각들이 쌓여 숨을 죽인다, 고요히

누구나 차츰 해류에 투명해지며.

인간들의 말들을 풀어 놓고, 말미잘과 꽃게들은

동료의 시체들을 팽개치고 떠날 뿐.

 

저무는 동네 어귀에 빈 병들과 빈 깡통들이 쌓은

탑 위로 모래는 덮어 온다, 어둠처럼.

탑을 쌓는 것만으로 인간의 길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말미잘들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어깨를 밀면서 깊은 곳의 신성을 힘겹게 짊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