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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1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4.

오세영 시인 / 1월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오세영 시인 / 4월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오세영 시인 / 5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오세영 시인 / 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오세영 시인 / 가을 2

 

 

우리 모두

10월(月)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는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 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읍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靈魂)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 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眞理)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恩寵)의 가을.

10월(月)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