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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1월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오세영 시인 / 4월
언제 우리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오세영 시인 / 5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오세영 시인 / 8월
8월은 분별을 일깨워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철 입는다.
쓰린 아픔 속에서만 눈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 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黃道)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달.
오세영 시인 / 가을 2
우리 모두 10월(月)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는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 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읍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靈魂)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 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眞理)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恩寵)의 가을. 10월(月)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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