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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명(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5.

조정권 시인 / 명(銘)

 

 

다음 봄에 당신들이 찾아낸 새파란 무덤 하나

그것이 나의 첫번째 공연(公演)이다.

풀섶에 맺히는 풀이슬처럼 저 혼자 투명하게 영글다 스러지는,

그 영롱한 몰락에 홀려가며, 홀려가며

자신의 체중을 다 소모해버린 이의 가벼운 잠, 그 홀가분한 끝마침을.

다음 봄 당신들이 만나는 최초의 종다리, 그것은 어저께까지도 살아 있었던 나의 첫번째 공연(公演)이다.

가장 먼 하늘 한 점 분홍빛으로 떠서

멈추면서 나아가고

멈추면서 나아가는

저 혼자 황홀한 피와 피의 부딪힘, 그 반복, 반복,

산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어느 일에 홀려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눈 덮인 광야에서 눈 위로 스쳐간 여우꼬리를 따라가며 홀려 버리고 마는 일과도 같은 것. 그러나 그것도 어저께까지 살아 있었던 너의 첫번째 공연(公演).

다음 봄에 당신들이 만나는 새파란 무덤 하나,

여기

온몸을 소모해 버린 삽 한 자루 잠들다.

 

백지 위에 별빛을, 민족문학사, 1985

 

 


 

 

조정권 시인 / 목숨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백지(白紙) 1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時間)의 마당에

백지(白紙) 한 장이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神)이 놓고 간 물음.

시인(詩人)은 그것을 시월(十月)의 포켓에 하루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神)의 뜻.

공손하게 달라 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 주신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백지(白紙) 2

 

 

백지(白紙)는 이미 그 자신이 원형(原型)이므로

되돌아가야 할 원형(原型)이 없다.

그래서 백지(白紙)는 불에 태워봐도

어느 틈에 다시 백지(白紙)로 돌아와 있다.

 

오늘 내가 받은

백지(白紙) 한 장.

비워둠으로써 내용(內容)이 담긴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짤막한 대답(對答).

 

언어(言語)란 도시 비속한 것이어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침묵에 의탁(依託)한 채

나의 가슴속에 초인종(招人鐘)을 울리고 있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