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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간염(肝炎) 백신
항체(抗體)를 만들려고 백신을 맞았다. 병균(病菌)은 적당히 지녀야 좋은 것, 증오(憎惡)는 적당히 키워야 좋은 것, 배신(背信)의 쓰린 아픔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간(肝)에 입히는 상처, 병(病)은 병(病)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긴다. 오늘도 나는 배신(背信)을 맛보며 쓸쓸히 돌아서는데, 항체(抗體)가 생겼다고 맘껏 술을 들어라 한다. 증오(憎惡)를 감춘 채 잔을 권하는 손과 손. 이별을 준비하는 만남의 손.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강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紹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시인 / 강의실(講義室)
시(詩)란, 빈 가지 위를 나르는 새, 추적추적 밖에는 비가 내리고, 가을비에 나무 하나 젖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부스러진 백묵(白墨), 강의실(講義室) 안에도 비가 오는데 침묵처럼 강의도 비에 젖는데
밖에는 함성(喊聲)과 투(投) 석(石). 프래카드 하나 바람에 떨고, 찢긴 노트 한 권 광장에서 울고,
시(詩)란, 칠판(漆板)에 잘못 쓰인 오자(誤字). 밖에는 투석(投石)이 오가는데, 강의실(講義室) 유리창이 깨지는데,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겨울 들녘에 서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 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오세영 시인 / 겨울 일기(日記)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寫眞) 속에 평안(平安)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 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액자(額子) 옆에는 시들어 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人形),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海岸)엔 어부(漁父)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生活)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년(年) 1월(月) 4일(日),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時間)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生涯)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물거품을 밀어 올린다.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寫眞), 그 속의 평화(平和),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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