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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희성 시인 /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5.

정희성 시인 /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제 중학교 일학년밖에 안되는

아들놈이 와서 가훈이 뭐냐고 묻는다

너희 학교에 교훈이 있듯이

학급에 급훈이 있고

아마 어떤 집에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가르침으로 주는 말이 있을 게라고 했더니

아니, 낱말뜻이 아니라

우리집 가훈이 뭐냐고

학교에서 적어 오랬다고 다그친다

열세살밖에 안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맹랑하게 애비를 다그친다

 

글쎄…… 뭐 가훈이랄 게 있겠느냐고

그냥 건강하게 살라고 하니

여편네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게 무슨 가훈이냐고

아이 자존심을 건드려도 유분수지

애비가 돼서 그럴 수가 있냐고

왜 이런 놈의 집에 시집와서

이 고생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린다 괘씸하게

괘씸하게 나를 긁는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집의 분열이다

 

하아…… 가문이 없어 가훈도 없다

가훈이 없어 집구석이 이 모양이고

집구석이 이 모양이니 새끼들도

애비 알기를 우습게 안다

가훈이 없다……가문이 없다……

가훈이 없어 그럴싸한 집이 없고

그럴싸한 집이 없으니

그럴싸한 가훈도 못 붙인다

 

하루는 꾼 돈을 갚으러 은행에 갔더니

거기에 가훈을 전시하고 있었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한 여자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앞에서 값을 물었다

삼만원이라고 했다

삼만원…… 삼만원이면 멋들어진

가훈 하나를 살 수 있다

낡아빠진 유치한 글귀지만

삼만원이면 가화만사성이다

 

내 선배 하나는 기자질을 하다가

입바른 소리 잘한다고 반공법에 걸리고

애비가 콩밥을 먹는 동안

아들놈은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기특하게도 특선을 했다

가화만사성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화만사성이고

분단이다

최루탄이다

 

벙어리가 말은 못해도

세월 가는 줄은 안다

분단 44년에

가화만사성한 놈이 있다면

개똥이다

하아…… 삼만원이 없다

삼만원이 없어 가화만사성을 못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고척동에서

 

 

머리 둘 곳 없는 고척동

여인숙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새벽이 오기 전 우리는

남은 몇 모금 소주로 목을 축여

네 이름을 부른다

밤이 우리들을 갈라놓은 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가

더디고 더딘 새벽이여

새벽의 친구여

공화국의 밤은 깊고 깊어

별은 저리 총총하고

하늘 밑 외롭고 적막한 막바지길에

우리를 이렇게 세워두는구나

담벼락에 기대 너를 기다리며

차마 바라보는 구치소의 불빛

눈시울 뜨거워라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그대 무덤 곁에서

 

 

내 못 가네 흰빛도 서러울 옷깃에

상기 못 놓아 서글픈 손길로

그대는 남아서 이 내 마음속에

산골 그늘밭에도 살아 있을 봄눈처럼

아깝고 깨끗한 사랑으로

그대는 남아서

흰빛도 차거울

그대 그냥 거기 있으니

또한 멀기도 멀 내 사랑의 길

버리고 간다 하고 내 못가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그리운 나무 1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70년대동인의시『고래』(책만드는집, 2012)

 

 


 

 

정희성 시인 / 그리운 나무 2

 

 

사람은 지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 가까이 가서 서성대기라도 하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시선』(2010. 가을)

 


 

정희성 시인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 『돌아다보면 문득』(2008) 등과 그 밖에 『한국현대시의 이해』(共著) 등이 있음.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시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2014 제5회 구상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