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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신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5.

이하석 시인 / 신천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또는 폭풍우를 숨은 채 꿈꾸며.

물 속 나사의 뜻은 훌러 내린다, 강철과

알미늄과 합성세제에서 떨어져 나가며,

물 공기 시간을 하나로 풀어 놓으면서,

녹물처럼 반란하며, 얼굴 붉히며.

나사에 걸린 물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에

벌써 힘이 빠진다.

풀들과 거머리와 모래들을 비켜서

이윽고 숨죽인 소리로 흐르다

그치는 물.

 

노란 해 잠자는 물 속 떠도는

나사들 하염없는 밑바닥 꿈꾸며 가라앉고,

들판에 닿기 전에 벌써 힘 빠지는 물.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안 1

 

 

구석진 내 넋의

차고 빛나는 유리덮개를 닦으면

꿈인가 강 저 편 언덕의 푸른 풀춤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내지르는 함성의 몸짓일까

강물엔 햇빛 들끓고

끊임없이 흐르며 사방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부르고

 

그러나 나는 다만 은밀히 내다보며

나의 춤을 휘장 속에 숨기며

또 내다볼 뿐

유리창 안으로

내 말과 춤을 어둠에 문지를 뿐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바다다슬기들은 민물에 삶긴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뺀찌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 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의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 채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요령이 생겨

때로는 쪽, 한 번으로도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살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원 또는 6백 원 어치의 껍질들만 남겨 두고

애인들은 가 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인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야외소풍 1

 

 

도로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만

달리는 길

 

도로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불빛 속 벗어나지 않은 채 달리며

나는 화살표가 비켜가는 숲의

캄캄한 안을 힐끗거린다

 

갑작스레 비치는 헤드라이트에

망연자실해진 나무들 아래

감춰져 있던 흰 길들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인다

 

빌딩숲 밑에서 모든 길들로

욕망을 열어두고 잠든 거지처럼

저 숲길로 자못 숨어드는 마음의

화살표는 어디?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야외소풍 2

 

 

소나무는 죽는다

도시에서 뻗어나온 길들이 칡넝쿨처럼

감고 올라와 전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바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칡뿌리를 캐다가 나의 마음이

그 뿌리에 걸려 죽은 나무 베어넘긴 골짝으로

굴러 떨어진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