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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신천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또는 폭풍우를 숨은 채 꿈꾸며. 물 속 나사의 뜻은 훌러 내린다, 강철과 알미늄과 합성세제에서 떨어져 나가며, 물 공기 시간을 하나로 풀어 놓으면서, 녹물처럼 반란하며, 얼굴 붉히며. 나사에 걸린 물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에 벌써 힘이 빠진다. 풀들과 거머리와 모래들을 비켜서 이윽고 숨죽인 소리로 흐르다 그치는 물.
노란 해 잠자는 물 속 떠도는 나사들 하염없는 밑바닥 꿈꾸며 가라앉고, 들판에 닿기 전에 벌써 힘 빠지는 물.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안 1
구석진 내 넋의 차고 빛나는 유리덮개를 닦으면 꿈인가 강 저 편 언덕의 푸른 풀춤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내지르는 함성의 몸짓일까 강물엔 햇빛 들끓고 끊임없이 흐르며 사방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부르고
그러나 나는 다만 은밀히 내다보며 나의 춤을 휘장 속에 숨기며 또 내다볼 뿐 유리창 안으로 내 말과 춤을 어둠에 문지를 뿐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바다다슬기들은 민물에 삶긴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뺀찌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 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의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 채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요령이 생겨 때로는 쪽, 한 번으로도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살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원 또는 6백 원 어치의 껍질들만 남겨 두고 애인들은 가 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인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야외소풍 1
도로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만 달리는 길
도로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불빛 속 벗어나지 않은 채 달리며 나는 화살표가 비켜가는 숲의 캄캄한 안을 힐끗거린다
갑작스레 비치는 헤드라이트에 망연자실해진 나무들 아래 감춰져 있던 흰 길들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인다
빌딩숲 밑에서 모든 길들로 욕망을 열어두고 잠든 거지처럼 저 숲길로 자못 숨어드는 마음의 화살표는 어디?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야외소풍 2
소나무는 죽는다 도시에서 뻗어나온 길들이 칡넝쿨처럼 감고 올라와 전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바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칡뿌리를 캐다가 나의 마음이 그 뿌리에 걸려 죽은 나무 베어넘긴 골짝으로 굴러 떨어진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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