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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노래 3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4.

조정권 시인 / 노래 3

 

 

날이 훤해지면서

다시 한밤이 오고 있었다.

목이 비틀려 죽은 수도꼭지는

목을 풀어주어도 죽어 있었다.

 

날이 훤해지면서

다시 한밤중 같은 눈이 오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받아보면

점점 더 한밤중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놓아도 죽어 있었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노래 4

 

 

죽은 이는 죽고

메아리는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이는 죽고

메아리는 사흘 밤 사흘 낮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이는 죽고

네 눈은 여기 없고

네 귀 여기에 없다

사흘 밤 사흘 낮이 지나도

네 눈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네 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독(毒)

 

 

공이 구른다

 

공은 둥근 것만은 아니다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사이에

어느 틈에 모가 나 있다

 

옆구리에서 패스를 받아 대쉬해 들어가던 너의 발끝이

냉기(冷氣)를 모으고 힘껏 각도(角度)를 꺾는 순간 저쪽에서

의미(意味)의 문전(門前)은 창(槍)을 안고 뒤로 자빠져 출렁거린다

 

공은 시퍼렇게 모가 살아 있다

이리 굴려지고 저리 굴려지며

쇠똥도 묻히고 개똥도 묻히는 사이

창공을 날아가며 부리로 팍팍 찍는다

 

공은 둥근 것만은 아니다

의미(意味)있게 전해지는 패스를 받으면서

너의 발끝이 힘차게 각도(角度)를 꺾는 순간

너의 전체중(全體重)은 공 모서리에 실린다

 

보라, 의미(意味)의 문전(門前)을 향해 날아들어가는

공의 눈은 온통 창(槍)이다

그물을 출렁거리며 흘러나오는 공을

쫓아들어가 더 깊숙히 차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독(毒)이다.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독락당(獨樂堂)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라이프찌히에서

 

 

중세의 길은 언제나 광장을 중심으로 나선으로 뻗어간다.

시내를 걷다보면 어느새 다시 광장으로 되돌아와 있다.

이것은 묘한 현상이다.

어느 틈에 내 몸에 길이 최면술을 걸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교회의 높은 첨탑을 표식으로 정해놓고 걷는다.

되돌아올 때를 위해서다.

나는 성(聖)토마스 교회를 목표로 걸어간다.

바흐가 밥 먹던 토마스 교회는 세월의 납이 더께로 굳어 있고

내부 수리로 닫혀 있다 해는 떨어졌다.

몇 해 전 겨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연주하고

고통의 하중(荷重)을 견디다 못해 기울어져 버린 그 건물은

신(神) 앞에서 몰락해가는 지상의 장엄한 구름과도 같다.

나는 바흐 옆에서 유령도시 같은 라이프찌히의 밤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른다.

백납 같은 어둠만 계속 찍힌다.

오가는 발길에 웅크린 낙엽들은

회리바람에 갇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바흐가 한자리에서 30년을 봉직하던 교회

바흐의 밥에 침을 뱉던 마귀들.

성(聖) 십자가와

발가락에 고이는 성혈(聖血)을 가슴에 품으며

그는 일요일마다 교회 성탁(聖卓)에 새 칸타타를 지어 바쳤다.

신(神)에게 바치는 음식은 늘 새로워야 했으니까.

그대 성탁(聖卓)을 지키는 위대한 종지기여.

신(神)의 도움없이 어떻게 그 삼백여 개가 넘는 칸타타가

저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오직 한 곳을 지향할 수 있었겠는가.

중세의 도시는 늘 교회를 중심으로 길이 흩어졌다가

다시 집결된다.

신(神)은 언제나 집합(集合)의 정점(頂点)이다.

 

신성한 숲, 문학과지성사, 1994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