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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중앙과 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5.

장정일 시인 / 중앙과 나

 

 

그는 중앙과 가까운 사람

항상 그는

그것을 중앙에 보고하겠소

그것을 중앙이 주시하고 있소

그것은 중앙이 금지했소

그것은 중앙이 좋아 하지 않소

그것은 중앙과 노선이 다르오

라고 말한다

 

중앙이 어딘가?

중앙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중앙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는 이자의 정체는 또 무언가?

중앙을 들먹이는 그 때문에

자꾸 중앙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먼 곳에

중앙은 있다고

명령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온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번 근무가 잘 끝나면

나도 중앙으로 간다고

그는 꿈꾼다

 

그러나 십년 세월이 가도

중앙은 그를 부르지 않는다

백년 세월이 그냥 흘러도

중앙은 그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중앙은 왜 그를 부르지 않는가?

중앙은 왜 그를 기억하지 않는가?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 시인 / 강정 간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내가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슬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 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

무얼 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

나는 기다린다. 짜증이 곰팡이 피는 오후 한때를

그리하여 잉어 비늘 같은 노을로 가득 처진 어깨를 지고

장석 덜그럭거리는 대문 앞에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몇 점 모래 털어 놓으며, 그저 그런 곳이더군 강정이란 데는

그렇게 가봤자 별 수 없었다는 실망의 말을 나는 듣고 싶었고

경박한 입술들이 나의 선견지명 칭찬해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강정 깊은 물에 돌팔매하자고 떠났거나

여름날 그곳 모래치마에 누워 하루를 즐기고 오겠다던 사람들은

안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기다림으로 녹슬며 내가 불안한 커튼

젖힐 때, 창가의 은행이 날마다 더 큰 가을우산을 만들어 쓰고

너무 행복하여 출발점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강정 떠난 사람처럼 편지 한 장 없다는 말이

새롭게 지구 한 모퉁이를 풍미하기 시작하고

한솥밥을 지으신 채 오늘은 어머니가, 얘야 우리도

강정 가자꾸나. 그래도 나의 고집은 심드렁히,

좀더 기다렸다 외삼촌이 돌아오는 걸 보고서.라고 우겼지만

속으로는 강정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

형과 함께 우리 세 식구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고

골목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구멍가게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강정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 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 나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 간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긴 여행』,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중국에서의 편지』가 있다. 1987년 제7회 최연소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