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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한 고통의 꽃의 초상(肖像)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영혼의 꽃피는 불을 위한 모든 것을 빨아올리고 준비한다. 걸어다닐 때도 춤출 때도 땅 속에 뿌리박고 있다. 땅은 어둡다. 그러나 뿌리인 그의 육체는 밝고 밝다. 지상(地上)의 햇빛 속에 피워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여 왜 어둡겠는가.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그의 목은 나무줄기와 같다. 그 목은 길고 투명하다. 목은 높은 데로 올라가는 신성한 사다리와 같다. 목은 아, 얼굴을 향하여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
나는 피어난 고통의 꽃 그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폭풍의 내부처럼 고요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눈은 눈물의 내부에 비친 기쁨의 빛의 넘치는 그릇이다. 자연의 폐(肺)의 향기를 향해 깊이 열려 있는 그의 숨결. 운명의 모습처럼 반쯤 열려 있는 저 입의 심연(深淵)의 고요. 회오리바람 기둥의 중심에 모인 힘으로 기쁨을 향해 열려 있는 얼굴. 오, 피어난 고통의 꽃 그대의 얼굴.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한 꽃송이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시상(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쪽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원시(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창(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한 숟가락 흙 속에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 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화음(和音)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日光) 은 저의 머나먼 항해를 접고 화염은 타올라 용약(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그대 발바닥의 화조(火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침상(寢床)에 상심(傷心)하는 제.
나는 그동안 뜨락에 가안(家雁)을 키웠으니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시간은 문득 곤두서 단면(斷面)을 보이며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풍산(風散)을 보았다.
그 뒤에 댕기는 음식과 어둠은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훤히 밝기도 하며 오감(五感)의 현금(絃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아픈 혼(魂)만큼이나 싸움을 익혀가느니.
그대의 숨긴 극치의 웃음 속에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 리야 그대의 질주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그대가 끊임없이 마루짱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그대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망명(亡命)하고 싶은 그 외에는.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흐르는 방(房)
길을 일으키기 위해 길을 달리면서 얻은 땀 중의 소금을 음식에 치면서 정든 길과 안개에 입맞추며 간다.
아직 보지 못한 불명(不明)의 범행(犯行)들이 저 삶의 마른 뼈 사이로 또 거듭 피를 흐르게 한다 잠이 없는 편협한 피를.
다시 저 빗소리가 편안한 집을 짓고 있고 빗소리의 소리의 흐르는 벽(壁)이 다만 사랑하는 방을 꾸미고 있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흙냄새
흙냄새 맡으면 세상에 외롭지 않다
뒷산에 올라가 삭정이로 흙을 파헤치고 거기 코를 박는다. 아아. 이 흙냄새! 이 깊은 향기는 어디 가서 닿는가. 머나 멀다. 생명이다. 그 원천. 크나큰 품. 깊은 숨.
생명이 다아 여기 모인다. 이 향기 속에 붐빈다. 감자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흙냄새여 생명의 한통속이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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