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한 고통의 꽃의 초상(肖像)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1.

정현종 시인 / 한 고통의 꽃의 초상(肖像)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영혼의 꽃피는 불을 위한 모든 것을 빨아올리고 준비한다. 걸어다닐 때도 춤출 때도 땅 속에 뿌리박고 있다. 땅은 어둡다. 그러나 뿌리인 그의 육체는 밝고 밝다. 지상(地上)의 햇빛 속에 피워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여 왜 어둡겠는가.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그의 목은 나무줄기와 같다. 그 목은 길고 투명하다. 목은 높은 데로 올라가는 신성한 사다리와 같다. 목은 아, 얼굴을 향하여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

 

나는 피어난 고통의 꽃 그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폭풍의 내부처럼 고요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눈은 눈물의 내부에 비친 기쁨의 빛의 넘치는 그릇이다. 자연의 폐(肺)의 향기를 향해 깊이 열려 있는 그의 숨결. 운명의 모습처럼 반쯤 열려 있는 저 입의 심연(深淵)의 고요. 회오리바람 기둥의 중심에 모인 힘으로 기쁨을 향해 열려 있는 얼굴. 오, 피어난 고통의 꽃 그대의 얼굴.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현종 시인 / 한 꽃송이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시상(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쪽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원시(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창(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한 숟가락 흙 속에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 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화음(和音)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日光)

은 저의 머나먼 항해를 접고

화염은 타올라 용약(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그대 발바닥의 화조(火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침상(寢床)에 상심(傷心)하는 제.

 

나는 그동안 뜨락에 가안(家雁)을 키웠으니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시간은 문득 곤두서 단면(斷面)을 보이며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풍산(風散)을 보았다.

 

그 뒤에 댕기는 음식과 어둠은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훤히 밝기도 하며

오감(五感)의 현금(絃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아픈 혼(魂)만큼이나 싸움을 익혀가느니.

 

그대의 숨긴 극치의 웃음 속에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 리야

그대의 질주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그대가 끊임없이 마루짱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그대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망명(亡命)하고 싶은 그 외에는.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흐르는 방(房)

 

 

길을 일으키기 위해 길을

달리면서 얻은

땀 중의 소금을 음식에 치면서

정든 길과 안개에 입맞추며 간다.

 

아직 보지 못한 불명(不明)의 범행(犯行)들이

저 삶의 마른 뼈 사이로

또 거듭 피를 흐르게 한다

잠이 없는 편협한 피를.

 

다시 저 빗소리가

편안한 집을 짓고 있고

빗소리의 소리의 흐르는 벽(壁)이

다만 사랑하는 방을 꾸미고 있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흙냄새

 

 

흙냄새 맡으면

세상에 외롭지 않다

 

뒷산에 올라가 삭정이로 흙을 파헤치고 거기 코를 박는다. 아아. 이 흙냄새! 이 깊은 향기는 어디 가서 닿는가. 머나 멀다. 생명이다. 그 원천. 크나큰 품. 깊은 숨.

 

생명이 다아 여기 모인다. 이 향기 속에 붐빈다. 감자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흙냄새여

생명의 한통속이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