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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식칼론(論) 3
내 가슴 속의 뜬 눈의 그 날카로움의 칼빛은 어진 피로 날을 갈고 갈더니만 드디어 내 가슴살을 뚫고 나와서
한반도의 내 땅을 두루 두루 날아서는 대창 앞에서 먼저 가신 아버님의 무덤속 빛도 만나 뵙고 반장집 바로 옆 집에서 홀로 계신 남도의 어머님 빛과도 만나 뵙고 흩어진 엄청난 빛을 다 만나 뵙고 모시고 와서 심지어 내 남근(男根) 속의 미지의 아들 딸의 빛도 만나 뵙고 더욱 뚜렷해진 무적(無敵)의 빛인데도, 지혜의 빛인데도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누룩돼지는 눈이 멀어서 흉물스럽게 엉뎅이에 뿔돋친 황소는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짐승은 다 눈이 멀어서 이 칼빛을 못 보냐.
생각 같아서는 먼 눈 썩은 가슴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당장에 우리나라 국어대사전 속의 `개헌(改憲)'이란 글자까지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눈 뜨고 가슴 열리게 먼 눈 썩은 가슴들 앞에서 번뜩임으로 있겠다! 그 고요함으로 있겠다! 이 칼빛은 워낙 총명해서 관용스러워서.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 시인 / 식칼론(論) 4
내 가슴 속의 어린 어둠 앞에서도 한번 꼿꼿이 서더니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그 어린 어둠을 한칼에 비집고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어디고 누구나 보이게 운다. 자유가 끝나는 저 쪽에도 능히 보이게 목소리가 못 닿는 저쪽에도 능히 들리게 한 번 번뜩이고 한 번 울고 번개다! 빨리 여러 번 번뜩이고 천둥이다! 크게 한 번 울고 낮과 밤을 동시에 동등하게 울리고 과거와 현재와 까마득한 미래까지를 단 한 번에 울리고 칼끝이 뛴다. 만나지 않는 내 가슴과 너희들의 벼랑을 건너 뛰는 이 무적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국가(國家)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 시인 / 식칼론(論) 5
왜 나는 너희를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너희가 꺼리며 침까지도 빨리 뱉는 내 몸뚱아리까지도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도둑의 그림자가 도둑의 그림자가 사알짝 덮치듯, 그렇게나마 못 만나고, 너희들이 피하는 내 땅과 내가 피하는 너희들의 땅은 한번도 당당히 못 만나는가 땅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서 뼉다귀가 뼉다귀를 부르는 저 목마른 음성처럼, 땅 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저 눈물같은 물줄기가 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 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 홀로 여기 서서 뜨드득 뜨드득 이빨 갈듯이 내 정신만을 가는가 내 외로운 살결은 살결끼리 붙어서 시간을 가는가, 아아 칼을 가는가.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 시인 / 쌀
멍청하게 와 버린 봄빛 위에서 머리 푼 저 북풍은 살아 있다. 흰 이빨은 펄펄 살아 있다.
만인에게 후려치는 내 눈물보다도 더 예쁘고 날쌘 남도 평야는 살아 있다. 누런 땅빛은 영원히 살아 있다.
남루한 삼베 치마저고리를 걸친 저 누님 같은 아낙네의 살빛은 살아 있다. 그의 전신경은 펄펄 살아 있다.
눈을 감으면 어지럽게 쏟아지는 쌀은 펄펄 살아 있다. 쌀 속의 모든 사연은 살아 있다.
북풍이 봄빛을 깔아뭉개는 소리 내 눈물이 만인을 내리치는 소리, 쌀이 쌀을 살해하는 소리, 모든 소리들은 다 살아 있다.
펄펄 살아서 쌀은 내가 밤마다 훔치는 한국어를 노래한다. 뱀의 혀보다도 더 빨리 노래하며 내 온몸에 살아 있다.
식칼론, 시인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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