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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낮이거나 저녁이거나 또는 한밤중이거나 잔주름지는 물의 푸르고 노란 또는 검은 자갈들 비치는 내에
그것은 있다
모래무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큰 머리 주억대며 은백색의 흰 배와 검은 등이 빛나는 몸에 여섯 개의 흐린 무늬가 찍힌, 모래 같은 그 고기는 수염을 떨며 모래 속에 파고들고 때로 모래를 불어 물결에 흘린다
그것은 냇물을 자맥질하면서 거꾸로 선 떡버드나무의 하늘을 휘젓고 그러면서 그게 내겐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 때문에 냇물은 흐르는 소리 높이거나 낮추고 거꾸로 선 나의 머리 아래로 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일까 까만 물풀일까 내가 한때 한껏 몸 기울인 채 보았던 연꽃의 그 아래의 어둠일까 빛일까 빈 병일지도 모른다 모래에 반쯤 몸을 묻고 양각된 글자와 그림들 물로 모래로 매끈해진 주둥이를 뻥하니 벌린 채 때로 물 아래서 번쩍이는
모래무지가 낸 길이 아른거리는 물결 아래의 모래 위로 나서 모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 어귀에 죽음과 생성의 그늘은 어른거린다 그걸 비켜가지 않으려고 그 길에 내려섰다가 아얏 하고 맨발은 마음보다 먼저 오그라지며 물 밖으로 튕겨 나간다 유리 조각에 찔렸나보다 아니면 내가 찾으려는 그것이 날 밀어낸 것일까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얼굴은 캄캄하게 그늘져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마 쯤에 달팽이의 더듬이 같은 게 돋아나 있는 듯하다 윤곽만이 외부의 빛을 역광으로 받아 고양이나 곰의 털 같은 머리털과 수염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때때로 뭐라고, 말, 한다 입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두운 내부에서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 하다 누군가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의 내부에선가 아르렁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이마에 돋아난 안테나들의 불이 켜지고 꺼진다 근심의 신호인지 기쁨의 표시인지 확인되지 않는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단추 1
열 일곱 개의, 또는 스물 한 개의 단추들이 그녀를 가두었다. 마음도 어항 곁에서 흔들리는 머리칼도 잠그고, 그녀는 검게 고개 숙였다. 누구에게나 검게, 고요하게, 그녀는 문을 닫아걸었다. 남자의 겨드랑이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단추로 바꾸어 달면서 그녀는 하느님에게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홀로 있다. 밤마다 그녀의 단추는 떨어져 내려 침대 밑을 구르며 문설주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럽다. 그녀는 단추만 보이면 주워선 잽싸게 스스로의 옷에 달았다. 마침내는 성기에까지도 단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언제나 어두운 골목 끝에 서서 그녀는 검게 빛났다. 어느덧 세상의 들판은 어두워졌고 곡식들은 빈 쭉지만을 땅에 떨어뜨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대가천 1
어떤 구애로 저 아래 불이 저리도 밝은가. 어둠 속에 나를 지우고 서서 밤새도록 깨쳐지지 않는 흔들리는 먼 불을 본다.
바람이 빽빽한 물들의 아래를 쓸며 지나간다. 새벽 자갈밭에서 재처럼 퍼져 한숨 쉬며 또 돌아갈 걱정에 싸인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동물도감
그가 기르던 너구리가 튀었다, 간밤 프라스틱의 쭈그러진 구멍을 통하여. 한때의 그의 집안 내력을 훔쳐서 너구리는 빌딩의 숲을 지나 달아나 버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의 기침 아래로 난 매캐한 수은의 길도 주저않고. 너구리는 무사히 이 도시를 빠져 나갔을까, 젠장, 절망적인 그리움이 그를 저녁이면 문 밖에다 세웠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세일즈맨 박씨는 주위가 허전해졌다. 그가 너구리 따위를 키우려들다니,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 도둑맞은 그의 삶이 그의 출근길을 빠져나가 새로운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 버렸다. 그는 동물도감을 낯선 집에 월부로 떠맡기면서 이따금 도시 밖으로 파란 빛깔이 깡충대며 산을 오르는 것을 힐끔거렸다. 제기랄, 지랄 같은 그리움의 봄.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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