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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덕규 시인 / 수색에 지다 전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1.

박덕규 시인 / 수색에 지다 전편

 

 

그 날 아침, 버릇처럼 손 뻗어 물잔을 찾았을 때

낯선 방바닥의 감촉에 손을 떴다. 여기가 어딜까.

옆에는 네가 누웠고 열어놓은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마침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가슴 한 곳에서 구토도 아닌 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우리는 전날 밤 몇 차까지 마셨는지 모른다.

내가 저녁에 영화인 납북 진상의 호외를 몰아쥐고 갔을 때는

모두 엔간히들 지쳐 있는 기색이었다. 생맥주 몇 잔으로 서먹한 분위기를 지우고

찌게집으로 자리를 옮겨 근래의 생업과 문단 동정과 소주 맛과

러시아 문학의 현황과 입대 문제와 안주 부족과 어떤 비평가의 유연한 필치에 대해서

들먹이다가, 언제 취했는지, 버스 안에서 고 형이 자꾸 통일

소원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누가 먼저 황 선생 집에 쳐들어 가자고 했는지,

나는 술 한잔만 더 달라고 황 선생에게 파격적으로 애걸했고

그 다음에 내가 주방의 술병을 향해 걸어갔는지 어쨌는지, 도막난

기억처럼 어디서 넘어져 무릎이 깨졌는데, 여자인

김형은 먼저 가고 너와 나는 고형을 따라

수색까지 갔을 테지. 고 형도 웬만큼 취했을 테니까. 수색,

말만 되뇌어도 나는 왜 남한의 최북단에 온 듯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을까. 현아, 너는 잠들어 있었고

나는 밤새 미적지근해진 물로 숙취를 달래며 비 듣는 소리를

들었다. 시계와 안경의 무사함보다 고형 내외에게의 미안함보다

간밤의 파격과 실수보다 이어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조각보다

수색,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생면부지의 이름의 비 듣는

눅눅한 수색, 알 수 없는 그 끈적끈적한 방바닥

헤어나기 힘들었던 수색, 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그 날 온종일 숙취보다 더 괴롭게 나를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수학여행

 

 

사립 대학교 국문과 아이들 코헤르와

버너를 들고 산으로 쌀과 지도책을 들고

산으로 어째서 반달곰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아직도 바다에는 젊은 부인을 좋아하는 식인 상어가

있을까 유적지엔 관광객과 휴지통이 너무 많고 도로는

확장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여승들은 목탁을

두들길까 대리석 건물은 종일토록 웅장하다 본관

가는 길 금싸라기 같은 분숫물이 떨어지고 봄에는

봄꽃과 진달래가 피는 길 승용차와 군중이

오고갔다 그만 휴학이나 할까 교수님은 어깨를

분필로 누르고 사립 대학교 사학과 아이들

노래를 부른다 밤새 동상은 달빛에 젖었다 몇 명의

복학생은 일찍 잠이 들고 문리대의 여왕은 집으로

돌아갔다 종이 울었다 아이들은 목이 다

쉬었다 산중턱으로 초록 별이 지고 눈꺼풀과

땀방울이 내려 앉는다 양철문을 열고 산으로

다시 행군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아름다운 사냥

 

 

왜가리는 왜가리

그가 선 채로 나를 겨냥했을 때

나는 한 마리 왜가리 하늘은 푸른 하늘

일순의 번갯불에 멎고 싶었다

 

그러나 돌을 줍고 던지지 않고

다시 등에 총을 꽂고 벌판 끝

나는 그의 머리 위를 배회하였다

하늘과 벌판이 맞닿는 곳에 가 쉬면서

그의 뜨거우나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야 했다 왜가리

 

그가 선 채로 나를 겨냥했을 때

나는 그의 영역에 떠도는 과녁

정맥 뛰는 정수리에도 나는

그를 기다렸다 못박히고 싶어

호흡을 멈추고 한 마리

 

그는 돌을 줍고 던지지 않고

담배를 문다 그 매연의 바위와 숲과 자연

그가 찾는 황금의 새가 되기 위하여

나는 자연 속에 있지만

오오 아픈 날개여 팔

한때는 현란한 눈부시던 먹장구름

이젠 땅으로 내리는 길도 막힌 것 같아

구름과 구름이 맞닿는 그 곳으로

 

가없는 왜가리 구름을 뚫고 와

누군가 다시 한번 나를 겨냥한다면

멎으리 뛰는 정맥 정수리까지

오직 그대 사랑 못박히고 싶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소설가)

1958년, 경북 안동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0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사냥>, <골목을 나는 나비> 등. 2005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14.1 한국문예창작아카데미 회장. 1982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1982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 1992 편운문학상 수상. 2001 제14회 경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15.5 제30화 이상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