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시인 / 가을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기몽(記夢) 부제: 『금성(金星)』지(誌) 발간(發刊) 서사(序詞)
시커먼 뫼를 넘고 넘고, 진흙빛 물을 건너고 또 건너 님과 나와 단둘이 이름모를 나라에 다다르니, 눈앞에 끝없이 깔린 황사장(黃沙場)― 석양(夕陽)은 아득하게도 지평선(地平線)을 넘도다.
난데없는 일진음풍(一陣陰風)이 흑포장(黑布帳)을 휘날리고 주린 가마귀 어지러이 떼울음 울자 모래 위에 산같이 쌓인 촉루들은 일시에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며 통곡(痛哭)하도다.
달이 서산(西山)에 기울어, 만뢰는 다시 잠들고 동편 하늘에 오직 별 하나― 영원의 신비로운 눈을 깜빡일 때에, 나는 님과 함께 상아(象牙)의 높은 탑(塔) 위에 올라가도다.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 크나큰 꽃 한 송이 떠올라 다섯 날 붉은 잎이 장엄(莊嚴)히 물 위에 벌어지며, 새벽 안개 속에 깊이깊이 감초인 대지(大地)로서 풍편(風便)에 종소리 한두 번 들려오도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나는 그대에게 온몸을 바치려노라
나의 가슴속 붉은 마음을 현실(現實)이 어느 틈에 도적하나니, 그대여, 내 앞의 현실(現實)을 분쇄(粉碎)하여라, 무쇠같이 튼튼한 그대의 팔로.
그대에게 향하는 붉은 정열을, 이지(理智)는 얄밉게도 썩게 하나니, 그대여, 내 속의 이지(理智)를 말려버려라, 유산(硫酸)같이 뜨거운 그대의 피로.
아아 햇빛보다 더 밝은 `의(義)'의 원리(原理)여, 나는 그대에게 온몸을 바치려노라, 현실(現實)의 밤고개를 넘어, 이지(理智)의 어스름길을 건너, 아아 이 몸을 오직 `실천(實踐)'의 제단(祭壇) 앞에 나가게 하라.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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