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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양주동 시인 /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1.

양주동 시인 /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Je suis le fils de cette race.―erhalen.

 

이 나라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라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라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平和)와 자유(自由)를

그의 형제(兄弟)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쓸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오나,

  숨결 있고 생명(生命) 있는

  이 나라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내 다시금 햇발을 보다

 

 

내 세상에 나 아무런 죄 없이

어린 혼이 다만 `삶'의 희망에 뛰놀 때에,

내 그날 아침에 웃는 얼굴로

돋아 오는 햇발을 바라보았노라.

 

내 하루 동안 아무런 허물이 없었거늘

벗은 나를 바리다, 나를 속이며 나에게 반역(反逆)하다,

내 그날 저녁에 쓸쓸한 얼굴로

말없이 지는 해를 전송하였노라.

 

이윽고 밤은 오다, 세상은 죽은 듯한데,

선(善)이며 악(惡)이며 모든 것이 그의 잠자리 속에서

오는 날의 할 일을 고요히 꿈꾸고 있는데,

내 깊은 밤에 호올로 깨어 목놓아 울다.

 

그러나 보라, 오늘도 아침의 햇빛이 빛나지 않느뇨,

내 세상에 나 아무런 죄 없었노라―

그저 약할 뿐이다, 일어나거라 약한 자여,

내 경건(敬虔)하고 힘찬 마음으로 다시금 햇발을 보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묘반(墓畔) 이수(二首)

 

 

1. 고비(古碑)

 

차디찬 바람에

이리저리 낙엽(落葉)이 구르는 산비탈 위에

애닯아라, 외로운 비석을 의지하여

말없이 누워 있는 무덤, 뉘 무덤인가.

 

잔디풀은 누구를 위하여

늦은 가을의 남은 햇빛을 받고 있느냐.

무덤 앞에는 새끼 달린 암소 잔디 위에 누워서

한가롭게 `삶'을 즐기고 있다.

 

뉘 무덤인가, 비문(碑文)의 이끼나 쓸어 보자―

지난 날엔 공도 많고 호사도 끔찍히 하였으련만,

글짜조차 희미한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여,

지금엔 새끼 달린 저 암소 그대보다 위대치 않으냐.

 

2. 샘물

 

Cette cau de diamant avait un gout de mort. ― T. Gautier

 

무덤가에

샘물이 흐른다,

바위틈으로 졸졸 흘러나오는

깨끗한 샘물, 옥 같은 샘물.

 

샘물에 손을 씻을까,

그 샘물 어찌나 찬지,

곁에만 가도 뼈에 사모치는 듯,

차디찬 샘물, 옥 같은 샘물.

아아 갑자기 몸서리치노니

혹시나 이 샘물이

죽음과 기맥을 통치 않는가,

무덤가의 샘물, 옥 같은 샘물.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梁柱東) 시인 / 1903∼1977

호:무애(無涯). 시인.국문학자.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 1923년에 유엽. 백만 등과 함께 시 동인지 <금성>을 발간, 창간호에 시 [기몽(記夢)] [영원한 비밀]을 발표.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 평양 숭실 전문 학교 교수, 1929년에는 <문예공론>을 발간. 1940~1945년에 경신 중학교 교사, 1947년에는 동국 대학교 교수로 취임, 이후 서울대, 경희대, 숙명 여대 등에 출강하여 국문학 고전과 영문학을 강의. 이어 1954년에 학술원 종신 회원, 그 후 연세대 교수, 동국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문화 훈장,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며, 신라 향가 등을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크게 기여. 저서에는 <조선 고가 연구><여우 전주><국어 연구 논고><국문학 고전 독본>등과 시집<조선의 맥박>,수필집<문주 반생기><인생잡기>, 역서 <에리엇 전집><영시 백선><세계 기문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