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시인 / 바벨의 탑(塔)
영겁(永劫)의 첫날, 인류의 조상이 그의 손으로 주춧돌을 받쳐놓은 `바벨'의 탑― 영겁(永劫)의 끝날 인류의 후손이, 그의 손으로 이맛돌을 더하야 완성될 `바벨'의 탑―
일이 시작된 지 오래였으나,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거기 돌 하나 쌓으려 한다. 그대여, 오라, 영겁의 한 순간에 돌 하나 맞들어 탑 위에 올리자.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불면야(不眠夜) 이수(二首)
1. 기적(汽笛)소리 들으며
밤비에 섞여서 멀리 기적소리 들리네. 그 소리 어느덧 가늘 적에는, 아마도 들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달렸나 보이.
어디로 향하는 길손들이 이 깊은 밤을 수레 속에 실려서 가나. 고국을 등지고 정처없이 길떠난, 한많은 나그네 저 속에 얼마나 되나.
그렇지 않아도 이 가을엔, 님 이별만도 죽기보다 싫은 때여든, 할일없이 집을 떠나, 어버이를 떠나, 고국을 떠나, 먼 나라로 향하는 길손.
밤 깊어도 비 소리는 그치지 않네, 기적소리 들리는 듯 잠못 이루네. 때는 가을, 가을에도 밤비는 궂이 오는데 떠나가는 사람의 회포야, 오죽이나 쓸쓸할라구.
2. 다듬이 소리
이웃집 다듬이 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남편들의 겨울옷 정성껏 짓는다면은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마음이 기쁘랴만은,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해어졌거나, 헐벗었거나, 하기 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하는가.
피마자 등불조차 가물가물 조을고 있을 이 밤중인데, 아낙네들 얼마나 눈이 감기고 팔이 아플까, 아직도 도드락 소리는 그냥 들리네.
어려서는 가을밤 다듬이 소리, 달밑에서 노래 삼아 들었더니만, 지금은 어지러운 생각 그지없어서 유풍칠월장(幽風七月章)* 다시 외어볼 흥치도 없네.
* 유풍칠월장: 칠월유화(七月流火), 구월수의(九月授衣)를 수구(首句)로 한 중국고시편(中國古詩篇)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사론
사나운 권력의 억제하는 명령 앞에서 때로는 양과 같이 무릎을 꿇기 쉬운 대중의 비겁― 혹시는 털끝만한 더러운 이욕의 미끼에 물려 물고기같이 꼬리치며 생명을 애걸하는 개체의 무력―
동지여, 그대는 낙심하는가, 아직 참으라, 한숨을 거두고 쾌히 책상을 뒤지라.
아아 어인일가, 양과 같이 그리도 온순하던 `작일'의 민중이 하루 아침 `정의'의 깃발 아래 범같이 날뛰며 갔도다. 저 보아, 바로 전에 물고기같이 그리도 불쌍히 파닥거리던 수많은 개체가 하룻밤 `부정'의 낚시대를 두 동강에 분질렀도다.
동지여, 놀람을 그치라, 이럼으로써 비로소 이 한 권이 인류의 역사가 아니뇨.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주동 시인 / 삶의 든든함을 느끼는 때 외 2편 (0) | 2020.03.13 |
---|---|
피천득 시인 / 어린 벗에게 외 2편 (0) | 2020.03.13 |
피천득 시인 / 아가의 오는 길 외 2편 (0) | 2020.03.12 |
양주동 시인 /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 2편 (0) | 2020.03.11 |
피천득 시인 / 아가의 기쁨 외 2편 (0) | 202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