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시인 /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Je suis le fils de cette race.―erhalen.
이 나라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라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라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平和)와 자유(自由)를 그의 형제(兄弟)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쓸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오나, 숨결 있고 생명(生命) 있는 이 나라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내 다시금 햇발을 보다
내 세상에 나 아무런 죄 없이 어린 혼이 다만 `삶'의 희망에 뛰놀 때에, 내 그날 아침에 웃는 얼굴로 돋아 오는 햇발을 바라보았노라.
내 하루 동안 아무런 허물이 없었거늘 벗은 나를 바리다, 나를 속이며 나에게 반역(反逆)하다, 내 그날 저녁에 쓸쓸한 얼굴로 말없이 지는 해를 전송하였노라.
이윽고 밤은 오다, 세상은 죽은 듯한데, 선(善)이며 악(惡)이며 모든 것이 그의 잠자리 속에서 오는 날의 할 일을 고요히 꿈꾸고 있는데, 내 깊은 밤에 호올로 깨어 목놓아 울다.
그러나 보라, 오늘도 아침의 햇빛이 빛나지 않느뇨, 내 세상에 나 아무런 죄 없었노라― 그저 약할 뿐이다, 일어나거라 약한 자여, 내 경건(敬虔)하고 힘찬 마음으로 다시금 햇발을 보다.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묘반(墓畔) 이수(二首)
1. 고비(古碑)
차디찬 바람에 이리저리 낙엽(落葉)이 구르는 산비탈 위에 애닯아라, 외로운 비석을 의지하여 말없이 누워 있는 무덤, 뉘 무덤인가.
잔디풀은 누구를 위하여 늦은 가을의 남은 햇빛을 받고 있느냐. 무덤 앞에는 새끼 달린 암소 잔디 위에 누워서 한가롭게 `삶'을 즐기고 있다.
뉘 무덤인가, 비문(碑文)의 이끼나 쓸어 보자― 지난 날엔 공도 많고 호사도 끔찍히 하였으련만, 글짜조차 희미한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여, 지금엔 새끼 달린 저 암소 그대보다 위대치 않으냐.
2. 샘물
Cette cau de diamant avait un gout de mort. ― T. Gautier
무덤가에 샘물이 흐른다, 바위틈으로 졸졸 흘러나오는 깨끗한 샘물, 옥 같은 샘물.
샘물에 손을 씻을까, 그 샘물 어찌나 찬지, 곁에만 가도 뼈에 사모치는 듯, 차디찬 샘물, 옥 같은 샘물. 아아 갑자기 몸서리치노니 혹시나 이 샘물이 죽음과 기맥을 통치 않는가, 무덤가의 샘물, 옥 같은 샘물.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주동 시인 / 바벨의 탑(塔) 외 2편 (0) | 2020.03.12 |
---|---|
피천득 시인 / 아가의 오는 길 외 2편 (0) | 2020.03.12 |
피천득 시인 / 아가의 기쁨 외 2편 (0) | 2020.03.11 |
양주동 시인 / 가을 외 2편 (0) | 2020.03.10 |
피천득 시인 / 생각 외 2편 (0) | 202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