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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피천득 시인 / 어린 벗에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3.

피천득 시인 / 어린 벗에게

 

 

사막에는 비가 아니 옵니다.

 

나무도 풀잎도 보이지 않고 모래만이 끝없이 끝없이 깔려 있는 곳이 사막입니다. 다른 땅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사막에는 뽀―얀 모래 위에 봄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푸른 잎새가 너울너울 늘어지고 그 사이로 차디찬 샘물이 흘러나려도, 사막에는 하얀 모래 위에 여름 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갖은 곡식이 열고 노랗게 붉게 단풍이 들어도 사막에는 하얀 모래 위에 가을 바람이 이따금 불 뿐입니다. 다른 땅에는 눈이 나리고 얼음이 얼어도 저 사막에는 아무러한 변화도 없이 끝없는 모래 위에 이따금 겨울 바람이 불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 벗이여, 이 거칠고 쓸쓸한 사막에는 다만 혼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깔깔한 모래 위에서 쌀쌀한 바람에 불려 자라는 어린 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어린 벗이여, 기름진 흙에서 자라는 나무는 따스한 햇볕을 받아 꽃이 핍니다. 그리고 고이고이 나리는 단비를 맞아 잎이 큽니다. 그러나 이 깔깔한 모래 위에서 자라는 나무는, 쌀쌀한 바람에 불려서 자라는 나무는, 봄이 와도 꽃 필 줄을 모르고 여름이 와도 잎새를 못 갖고 가을에는 단풍이 없이 언제나 죽은 듯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벗이여, 이 나무는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을도 지나고 어떤 춥고 어두운 밤 사막에는 모진 바람이 일어, 이 어린 나무를 때리며 꺾으며 모래를 몰아다 뿌리며 몹시나 포악을 칠 때가 옵니다. 나의 어린 벗이여, 그 작은 나무가 죽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때 이상하게도 그 나무에는 가지마다 부러진 가지에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꽃이 송이송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 꽃빛은 별 하나 없는 어두운 사막을 밝히고 그 향기는 멀리멀리 땅 위로 퍼져 갑니다.

 

서정시집(抒情詩集), 상호출판사, 1947

 

 


 

 

피천득 시인 / 어린 시절

 

 

구름을 안으러 하늘 높이 날으던 시절

날개를 적시러 푸른 물결 때리던 시절

고운 동무 찾아서 이산 저산 넘나던 시절

눈 나리는 싸릿가지에 밤새워 노래 부르던 시절

안타까운 어린 시절은 아무와도 바꾸지 아니하리

 

서정시집(抒情詩集), 상호출판사, 1947

 

 


 

 

피천득 시인 / 이슬

 

 

그리도 쉬이 스러져 버려

어느새 맺혔던가도 하시오리나

풀잎에 반짝인 것은 이슬이오니

지나간 순간은 의심치 마소서

 

이미 스러져 없어진 것을

아모레 여기신들 어떠시리만

그래도 그 순간이 가엾사오니

지나간 기억은 의심치 마소서

 

서정시집(抒情詩集), 상호출판사, 1947

 

 


 

피천득(皮千得. 1910 ~ 2007) 시인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 서울 출생. 호는 금아(琴兒). 상해 호강대학교(University of Shanghai) 영문과를 졸업.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을 발표하여 등단.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낀 감정을 순수하고 서정적으로 그려 낸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수필집 "인연", "금아 문선", 시집에 "서정 시집", "금아 시문선", "산호와 진주"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경성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 주임교수를 지냈다. 1991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995 제9회 인촌상 (문학부문). 1999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