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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문병란 시인 / 인연서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9.

문병란 시인 / 인연서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곷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인연서설》 1999

 

 


 

 

문병란 시인 / 꽃가게 앞을 지나며

 

 

그 꽃빛깔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진

온갖 꽃들이 진열된

꽃가게 앞을 지나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문득

너의 이름이 떠오른다.

 

진정 그리움이란

진홍빛 장미꽃만큼이나

간절히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냐.

 

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

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

거기 눈부신 이국종

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

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

 

삶의 외로움 나누는

목마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

이리도 간절히 발돋움해 애태운다.

 

오라, 노을 지는 꽃길 위에

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

 

《인연서설》 1999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생애 및 활동사항>

 

 

전라남도 화순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현대문학』에 「가로수」 추천, 1963년 「꽃밭」으로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1971년 발간한 첫 시집 『문병란 시집』에는 시인의 시론이 잘 드러난다. 시인에게 시는 신앙과 같은 존재이며 시창작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이 되기에 시인은 시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문학관을 견지하였다. 시 창작을 통해 현실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연결된다. 실존적인 고독이나 부당한 해직과 복직으로 맞닥뜨린 삶의 현실은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시세계를 열어가는 근간이 되었다. 시인으로서의 신념은 「오늘, 문학을 생각한다」에 드러나며, 문학인으로서의 진정성을 매우 강조하였고, 문학세계도 이 기본 신념을 펼치는 것으로 드러난다. 반인간적인 모든 모순을 극복하고 진실과 역사 앞에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은 처음에도 인간, 최후에도 인간이 주제임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전라도 지역의 장수 동인 ‘원탁문학’을 이끌며 『원탁시』에 참여하였다. 「광주지역 문학의 과제와 전망」을 통해 지역문학의 활성화에 대한 남다른 헌신과 전망도 발표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행사보다는 문학적 결실을 이루는 문학제로 거듭나기를 강조한 바 있다.

 

1970년대 이후 시집 『죽순 밭에서』을 시작으로 『벼들의 속삭임』(1978), 『5월의 연가』(1986), 『땅의 연가』(1981), 『뻘밭』(1983), 『무등산』(1986), 『견우와 직녀』(1991), 『새벽의 차이코프스키』(1997), 『인연서설』(1999),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2001), 『동소산의 머슴새』(2004) 등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발간한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2015)에서 시의 아름다움이란 진실함 속에서 발현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975년부터 자유실천문인협회에 가입하여 반독재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생 동안 시창작과 시교육을 함께 하다가 2015년 9월 25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전라남도 화순 출생. 호는 서은(瑞隱). 1961년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이 3회 추천 완료하여 문단에 나옴. 1988년에 조선대학교 국문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가 2000년에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명예교수.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6년 5.18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79년 전남문학상을 시작으로 하여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문화예술상, 한림문학상, 박인환 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