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 하동포구(河東浦口)
유행가 가락 따라 나도 모르게 왔네 빈 호주머니 노자도 없이 엿판도 못 짊어진 전라도 사나이 삼학(三鶴)소주 한잔에 취해서 왔네 하동포구 80리에 빈 모래사장만 눈부시고 발자국도 없이 쫓겨온 사나이 눈부신 햇살에 갇혀 길을 잃었네 무슨 알뜰한 옛사랑의 맹세도 없이 삼천포(三千浦) 아가씨의 설운 눈물도 없이 덧없이 부서진 마음 모래알로 빛나는데 어디서 누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옷소매 잡는가 눈부신 한낮이 길게 누워 있는 나루터 주인 잃은 빈 배만 흔들리는데 눈물을 씹어봐도 한숨을 씹어봐도 쓴맛 단맛 알 수 없는 설운 내 팔자 하동포구는 아직도 울고 싶은 곳이더라 하동포구는 아직도 사나이 옛정이 목메는 곳이더라 돈타령 팔자타령 사랑타령 한잔의 막걸리만 남은 땅에서 어느 문둥이가 손톱을 뭉개다 간 모래밭에서 알알이 빛나는 모래알을 적실 무슨 짭짤한 눈물이나 남았던가 모래밭 속에 몹쓸 이름 깊이 묻으면 추억은 소주처럼 저려오는 눈물 두 주먹 불끈 쥐고 땅을 쳐봐도 뻘밭에 오줌을 철철 갈겨봐도 무심한 햇살만 남아 있더라 빈 소주병만 남아 있더라 환장하게 환장하게 눈부신 모랫벌만 지글지글 타더라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문병란 시인 / 호수(湖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목포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소주 한 잔을 기울일거나
벌거벗은 빈 산 돌멩이 만지며 풀포기 뽑으며 서쪽 끝에 와서 삐비꽃처럼 목을 뽑아 올리다 로빈슨크루소가 되어버린 사람들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술이 취해서 봐도 술이 깨어서 봐도 유달산만 으렁으렁 이빨을 가는구나.
《죽순 밭에서》 인학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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