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 직녀(織女)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쳐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문병란 시인 / 코카콜라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같이 양(洋)병에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 낀 일등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매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켜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슬슬 잘 넘어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잘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턴가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레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켜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을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금털털 게트림만 씁쓰름히 남아 있더라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편지
고향엔 고향엔 5월이 왔다 고향엔 고향엔 뻐꾸기가 울고 있다 제비쑥 탐스런 언덕 위에서 쑥바구니 던져두고 울던 누이야
치마끈 끌러놓고 쉬어가는 계절 넉넉한 5월의 햇살 아래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고 있다 산꿩이 알을 품는 보리밭 가에서 쑥나물 질근 씹으며 울던 누이야
지금은 어느 꽃밭을 날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느냐 문명의 앵속꽃 피는 아편굴에서 두 눈 빼앗긴 슬픈 불나비 고운 날개마저 모조리 찢기었느냐 밤마다 어느 외인병사 앞에서 수지운 열아홉살이 서러운 누이야 쑥니풀 향기 대신 독한 지폐내음 진달래꽃 향기 대신 역겨운 술내음 이국 병사의 첩첩한 가슴 속에서 헤매다 헤매다 쓰러진 나비야
고향엔 고향엔 5월이 왔다 안골엔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고 밭고랑엔 탐스레 살벌은 보리모개 떡갈잎 사이에 뻐꾸기 숨어 울고 종달새도 비비배배 자지러졌다 지금은 논두렁에 빈 바구니 던져 두고 어디론가 팔려가 소식 없는 누이야.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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