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 정당성 2
때때로 나의 주먹은 때릴 곳을 찾는다.
그 어느 허공이든가 그 어느 바위 모서리이든가, 주먹은 때릴 곳을 찾아 고독하다.
뻔뻔한 이마, 오만한 콧날을 향하여 꼭 쥐어진 단단한 주먹.
응집된 핏덩일 물고 사각의 쟝글 속에 불꽃을 튀기는 일순, 산산히 부서져가는 그 어느 절정에서 나의 주먹은 피를 흘린다.
지금은 싸움이 끝나고 패배를 어루만지는 고독한 주먹, 그 어느 허공을 향하여 캄캄한 어둠을 겨냥하고 있다.
언젠가는 뜨거운 유혈에 젖어 피를 물고 깨어져갈 슬픈 묵시(黙示), 주먹은 정당성을 찾고 있다.
문병란시집, 삼광출판사, 1971
문병란 시인 / 죽순(竹筍)밭에서
죽순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 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 먹고 이슬을 받아 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나오는 소리
죽순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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