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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3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3

 

 

산맥과 산맥이 숨가쁘게 치달아 내려간 곳에

바다가 가로막고,

길은 절벽에서 끝났다.

돌아갈 길 잃었도다.

구름낀 암석과 조용한 무덤들 사이 밤이 오고 있다.

바윗틈 흑조(黑鳥)들은 인기척을 피해 어둠 속으로 깃을 숨기고

어둠에 잠긴 돌 껍질을 부리로 쪼며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방랑자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대 왜 어두운 눈초리로

벼랑에서 쏟아지는 어둠의 폭포를 들여다보는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듯 숨가쁜 호흡을

핏속에서 꿈꾸고 있는가.

그대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저 아래 바다에 달빛 차 오르면

빈 배는 노 없이도 혼자 가고,

죽은 어부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

저 바다의 그리운 옛길을 찾아 마슬가듯.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에게 휴식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잠인가.

썩은 흙내음을 칠흑같은 사방에 끼얹어대는 나뭇잎과

곳곳에 나뒹굴어 흙빛깔로 돌아간 삭은 나무 둥치들,

도처에서 안개는 발목을 휘어감으며 가라앉고

발뿌리에 걸리는 돌무더기와

죽음의 신호를 보내는 흑조(黑鳥)들의 울부짖음,

입을 가로막는 어둠속 낭떠러지,

그대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길은 언제나 땅에서 벗어나 절벽 끝으로 이어지고

저 아래 바다는 세계가 태어나기 전의

바람소리의 공허를 알리고 있다

세계가 비롯되기 이전의 무구(無垢)한 바다는

늘 시작의 순간처럼 물결을 새롭게 되돌려 준다.

그대가 그대를 통해 새로워지는 장소, 물속의 신전(神殿), 기둥들.

수없이 많은 수정(水晶)의 고요한 빛을 가라앉힌 정신의 장소.

길은 어디 있는가.

처음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는.

바다가 오랜 세월 생성(生成)해온 것은 모래일 뿐.

육지 기슭으로 밀어올린 것은

입을 크게 벌린 공허의 거품과 한밤중 같은

거어(巨魚)의 뼈.

또는 조개들이 자던 하얀 화석(化石)의 잠.

그들 역시 길을 잃었도다.

그대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휴식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잠인가.

그대 아직도

눈은 암흑속에 던져진 돌처럼 우주를 헤매며 고아를 꿈꾸고 있는가,

귀는 설원(雪原)속으로 탐험을 떠나 소리치는

설풍(雪風)속에서 혼돈을 그리워하고, 깨우쳤지만

발은 길을 잃었도다.

하늘에서 장닭이 홰를 치듯 태양이 세계의 문(門)을 열기 전부터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처음의 순간은 어디였는가.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4

 

 

오, 불이여, 혼 속에 깃든 혼이여.

너의 함성 속에는

큰 고요가 있구나.

어둠을 향해 달리던 너의 투구는

여명의 구멍을 통해 아침을 맞는구나.

치솟으면서 치솟으면서

가라앉힌 신전(神殿)이여.

고요여.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7

 

 

오랜 세월 내 유년(幼年)에

굳건히 밑둥을 내린 월계수(月桂樹)나무여.

너의 밑둥은 지친 자가

명상의 처음 출발지로 삼았던 곳.

대지로부터

지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향해 출발한 네 뿌리의 도정(道程)은 끝나지 않고.

끝도 없는 기원을 찾아

너는 헤매는구나.

오, 뿌리의 수고로움인 무성한 그늘이여.

너의 밑둥은 명상에 지쳐서 돌아온 자의 휴식처,

잎사귀는 목마른 자의 우물.

너로부터 무성한 줄기와 가지가 출발하듯

나의 길은 시작되었고

한때는 지상을 덮으며

하늘의 길을 향해 뻗어가며

치솟아 달려갔건만.

마치 조그마한 잎사귀 사이에서

수많은 트럼펫들이 일제히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수없는 비둘기떼를 비상시킨 것처럼

내 꿈도 날아올랐건만.

그리고 한때는

명상하는 내 창가에 살랑거리는 미풍의 파도를 싣고와 바람의 젓가락으로

경쾌한 선율을 뿌렸건만.

오, 월계수 가지여, 네가 하늘에다 펼쳐 놓은 천상(天上)의 책(冊)

너의 책(冊)의 갈피 갈피는 태양이 금빛 알을 숨기기 좋은 곳.

밤이면 별이 이슬을 모아 숨기기에 은밀한 곳.

그리고 네 밑둥 주변의 꽃밭은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가 지휘봉을 든 채

새와 달과 별과 도마뱀을 데리고

음악을 연주했던 곳.

오, 월계수나무여.

천상에서 지상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숙인 하프여.

내가 네 몸을 탄주하면

너는 만질수록 맑고 고요해 가는 음악.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더없이 맑고 고요한 하늘.

너의 잎사귀는 마치 다섯 손가락과도 같이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어

천상의 별을 고요히 받으며

지상으로 고요히 따르는 잔.

내 영혼이 그 잔을 입대고 마실 수 있었다면

두 날개를 겨드랑이에 단 하프처럼

영혼의 품에 안겼을 것을.

월계수나무여.

너로부터 나는 방황하는 두 다리의 막대기를 부여받아 헤매왔건만

이제는 휴식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내가 일찍이 지상의 이정표로서 꽂아 놓은 물음표여! 월계수나무여!

직립하는 신(神)들의 권능이여!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