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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바람의 노래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오세영 시인 / 보석(寶石)
화석(化石) 속엔 한 마리 새가 난다. 결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
내가 흘린 눈물도 쥬라기 지층(地層) 어느 하늘 아래 하나의 보석(寶石)으로 반짝거릴까, 가령 죽음이라든가, 죽음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눈.
스스로 불에 타서 소멸(消滅)을 선택하는 지상(地上)의 별들이여, 묻혀라 화석(化石)에. 영원히 죽는 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불 1
타버린 정신(精神)들은 어디 갔는가 가령, 설원(雪原)에 버려진 장미꽃 하나 혹은, 알타이에 떨어지는 햇살, 바람과 소나기, 그리고 6월(月)은 불탄다.
내 살 속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뛰어가고, 알콜이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이십 세기는 불을 지핀다. 물질(物質)이 흘린 피. 싸늘한,
실용(實用)의 새는 날 수 있을까, 어두운 내 얼굴을 날아서, 찬서리 내린 굴뚝과, 기계(機械)들이 죽은 무덤을 넘어서 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선(電線)에 걸린 달, 인간의 숲속에서 전화(電話)가 울고, 아흔 아홉 마리의 이리가 운다. 저것 보라면서, 불타는 서울의 술집들을 가리키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타버린 정신(精神)의 재 죽음, 혹은 창조의 불빛.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 3
불빛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달려나갔다. 전라도의 보리밭이 보이고, 황폐한 과거가 몇 개로 구획되었다. 먼, 황인종의 마을에서 개가 짖고 칸델라의 불빛이 경험으로 풀려 나가고 지나온 십구 세기가 토막토막 잘려 자막(字幕)에 걸리고 있다. 렌즈를 열고 흰옷의 그가 나온다. 전라도 사투리로 판소리를 부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끝끝내, 심청이를 불렀다. 도무지 갈채(喝采)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서 불이 켜지고 헛간에 켜 둔 램프가 의식(意識)을 태운다. 낡아가는 한 시대(時代)의 필름. 어리석은 사내에게 몸을 맡긴 계집은 밤새워 지나가는 트럭 소리를 듣고 졸린 눈의 수학(數學)을 보았다, 결국 벗을 것인가 이 흰옷, 정지된 자막(字幕)에 걸린 채 나는 벌거숭이 몸을 하고 손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뽑았다. 흔들리는 전라도의 논둑길 그 불빛 속을 뛰었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 5
화약 냄새를 맡으며 새벽을 더듬는다. 발치엔 츈향뎐이 뒹굴고, 소리들이 뒹굴었다.
초사흘 달밤에 배가 한 척 밀려 온다, 성균관 뒤뜰을 도둑이 들고, 누구냐고 외치는 등뒤에서 싸늘한 칼이 번득였다.
그 칼. 판단의 힘, 어떻게 쓸 것인가, 횃불들이 소란하게 문을 두드린다. 끊어진 줄. 동양(東洋)의 구슬들이 땅바닥에 쏟아진다.
쏟아진 하얀 피. 초사흘 달밤을 토해 낸 기적(汽笛)이 흩어지고 희미한 포대의 불빛이 흩어지고,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셔만호의 굴뚝을 향해 총을 겨눴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면(不眠)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로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가서 오지 않는다.
수심(愁心)에 가득 찬 표범처럼 암흑을 건너온 사랑의 이야기는 끝내 돌이키지 못한다. 안녕(安寧)을 알리는 전화(電話)가 울고 회선(回線)에 목이 잠긴 소녀(少女)가 울었다.
마른 입술을 태우는 담배처럼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오지 않는다. 욕망(慾望)이 죽고, 진리(眞理)가 죽고, 전설(傳說)로 떠난 목마(木馬)는 시든 꽃과 슬퍼하는 공주(公主)를 남긴 채 한(恨)처럼 흐르는 강(江)을 건넜다.
목마(木馬)에 끌려가는 시간(時間)의 사슬소리, 계절(季節)이 말라붙은 창(窓)을 글썽이는 별들이 들여다보고 가장 아픈 말 한 마디를 차마 쓰지 못한 시인(詩人)은 끌려가는 목마(木馬)의 울음소리만 들을 뿐이다.
대답하지 않으리라. 암흑을 건너 암흑에 도달한 운석(隕石)처럼 깊이깊이 묻히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로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버린 청춘(靑春)은 한번 가서 오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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