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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바람의 노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

오세영 시인 / 바람의 노래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오세영 시인 / 보석(寶石)

 

 

화석(化石) 속엔 한 마리

새가 난다.

결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

 

내가 흘린 눈물도

쥬라기 지층(地層) 어느 하늘 아래

하나의 보석(寶石)으로 반짝거릴까,

가령 죽음이라든가,

죽음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눈.

 

스스로 불에 타서 소멸(消滅)을 선택하는

지상(地上)의 별들이여,

묻혀라 화석(化石)에.

영원히 죽는 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불 1

 

 

타버린 정신(精神)들은 어디 갔는가

가령, 설원(雪原)에 버려진 장미꽃 하나

혹은, 알타이에 떨어지는 햇살,

바람과 소나기, 그리고 6월(月)은

불탄다.

 

내 살 속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뛰어가고, 알콜이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이십 세기는 불을 지핀다. 물질(物質)이 흘린

피. 싸늘한,

 

실용(實用)의 새는 날 수 있을까,

어두운 내 얼굴을 날아서, 찬서리 내린 굴뚝과,

기계(機械)들이 죽은 무덤을 넘어서

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선(電線)에 걸린 달, 인간의 숲속에서

전화(電話)가 울고, 아흔 아홉 마리의 이리가 운다.

저것 보라면서,

불타는 서울의 술집들을 가리키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타버린 정신(精神)의 재

죽음, 혹은 창조의 불빛.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 3

 

 

불빛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달려나갔다.

전라도의 보리밭이 보이고, 황폐한 과거가

몇 개로 구획되었다.

먼, 황인종의 마을에서 개가 짖고

칸델라의 불빛이 경험으로 풀려 나가고

지나온 십구 세기가 토막토막 잘려

자막(字幕)에 걸리고 있다.

렌즈를 열고 흰옷의 그가 나온다.

전라도 사투리로 판소리를 부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끝끝내,

심청이를 불렀다.

도무지 갈채(喝采)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서

불이 켜지고 헛간에 켜 둔 램프가

의식(意識)을 태운다.

낡아가는 한 시대(時代)의 필름.

어리석은 사내에게 몸을 맡긴 계집은

밤새워 지나가는 트럭 소리를 듣고 졸린 눈의

수학(數學)을 보았다, 결국

벗을 것인가 이 흰옷, 정지된 자막(字幕)에

걸린 채 나는 벌거숭이 몸을 하고

손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뽑았다.

흔들리는 전라도의 논둑길

그 불빛 속을 뛰었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 5

 

 

화약 냄새를 맡으며 새벽을

더듬는다. 발치엔 츈향뎐이 뒹굴고,

소리들이 뒹굴었다.

 

초사흘 달밤에 배가 한 척 밀려

온다, 성균관 뒤뜰을 도둑이 들고,

누구냐고 외치는 등뒤에서

싸늘한 칼이 번득였다.

 

그 칼. 판단의 힘, 어떻게

쓸 것인가, 횃불들이 소란하게 문을

두드린다.

끊어진 줄. 동양(東洋)의 구슬들이

땅바닥에 쏟아진다.

 

쏟아진 하얀 피. 초사흘 달밤을

토해 낸 기적(汽笛)이 흩어지고

희미한 포대의 불빛이 흩어지고,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셔만호의 굴뚝을 향해 총을

겨눴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불면(不眠)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로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가서 오지 않는다.

 

수심(愁心)에 가득 찬 표범처럼

암흑을 건너온 사랑의 이야기는 끝내

돌이키지 못한다.

안녕(安寧)을 알리는 전화(電話)가 울고 회선(回線)에 목이 잠긴

소녀(少女)가 울었다.

 

마른 입술을 태우는 담배처럼

마른 육체(肉體)를 불사른 청춘(靑春)은 오지 않는다.

욕망(慾望)이 죽고, 진리(眞理)가 죽고, 전설(傳說)로 떠난 목마(木馬)는

시든 꽃과 슬퍼하는 공주(公主)를 남긴 채

한(恨)처럼 흐르는 강(江)을 건넜다.

 

목마(木馬)에 끌려가는 시간(時間)의 사슬소리,

계절(季節)이 말라붙은 창(窓)을 글썽이는 별들이

들여다보고

가장 아픈 말 한 마디를 차마 쓰지 못한 시인(詩人)은

끌려가는 목마(木馬)의 울음소리만 들을 뿐이다.

 

대답하지 않으리라.

암흑을 건너 암흑에 도달한 운석(隕石)처럼

깊이깊이 묻히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睡眠劑) 한 알, 혹은 보로도산(産) 꼬냑에 취해

마른 육체(肉體)를 버린 청춘(靑春)은 한번 가서

오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