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정일 시인 / 안동에서 울다
언젠가 왔던 듯한 도시. 산림이 벽처럼 둘러쳐진 한국의 중북부 낮은 건축 사이로 울긋불긋한 바람이 지나가고 몇 개의 아이스크림 껍질이 흙먼지와 섞여 날은다. 중북부 누구나 이런 소도시에 오면 미국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도 좋으리라. 여기에도 코카콜라를 마셔대는 갈증난 목구멍이 있고. 문제의 외화를 보는 호기심이 있고. 광광 울리는 팝송이 있으니
중북부의 소도시. 어딜 가나 한국의 찻집에는 중년들이 있다 정치적 예언가 역할을 즐기는 중년신사가 있어 개혁세력, 후계자 또는 한 재벌의 기업의 어이없는 무너짐에 대하여 진단하고 의심하고 예언한다. 그 어딜 가나 한국에는 책임감 없는 논객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 모두가 부르주아가 되면 될 것이라고 호탕하게 껄껄거리는 중년이 있다. 한국의 어느 도시엘 가나 문제가 있는 곳에 문제의 중년이 있고 추문이 있다. 나이 먹은 추물이
벌써 이곳의 어린 소녀들도 유행의 소매 끝으로 손등을 덮고 다닌다. 유아기적인 것과 가까워지려는 최근의 문화양식이 이곳 계집아이들의 손등을 덮쳐 누르고 있다. 계집의 손등만 아니라 모든 도시는 서울화. 모든 도시는 최근의 서울화인 것. 언제나 끊임 없이 서울식의 삶을 반추해야 하는 소도시 출세를 결심한 자들이 칼을 갈며 떠나간 텅 빈 소도시로 서울이 덮고 남은 절정 없는 밤이 내려 깔린다.
그러면 유격훈련에 임한 신병같이 한 번씩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첫딸의 이름을 부르고. 낯선 소도시를 무대로 비상한 상술을 벌여 놓은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실비의 여관을 찾는다. 서적외판원이며 남성향수외판원. 캘린더 주문배수원들이 하나. 둘. 값싼 여관을 찾는다. 소도시의 3류 여관에서 출세한 자들의 서울에서 탈락한 뜨내기 서울내기들이. 하루의 피곤을 풀처럼 눕히리라.
언젠가 왔던 듯한 도시. 산림이 벽처럼 둘러쳐진. 한국의 중북부 거기에 싸락눈처럼 잠이 떨어진다. 그러나 잠들지 못하는 회한도 있으리라.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여기가 어디지? 끝? 끝? 그래 너는 이제 끝이야. 외판원이 너의 끝이야. 네 삶의 끝이야!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사나이는 울어버린다. 중북부의 외진 소도시가. 썰렁한 소도시의 초라한 여관의. 꿉꿉한 이불이 다 큰 사나이를. 서울내기 사나이를 울려 버리고 만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 시인 / 약속 없는 세대
우리들은 약속 없이 만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언제나 약속을 하고서야 만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미 약속없이 만날 수 있는 영감이 사라진 지 오래니까. 하므로 우리에게 약속 없이 만나는 갑작스런 기쁨이 선사되는 일이라곤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체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하기나 했다는 걸까. 우리들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고, 우연히 극장에서 만났는데, 그리고 디스코 텍과 맺주 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또 한잔 더 하기 위해 찾아들어간 포장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래, 이런 일들이 정말 어떤 약속하에 이루어진 것일까, 정말 어떤 약속하에? ―믿기는 어렵다.
우리들이 만나기 위해 더는 약속이 필요치 않다. 우리들은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예민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티 브이를 켜면 만나지는 얼굴같이, 너와 내가 만나는 것은 타성이다. 우리들은 그 습관 위에서 만난다.
진정 사랑할 만한 그녀를 공들여 찾아내고, 전화번호를 훔치고, 그녀가 있을 만한 시간을 점쳐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전화를 하고, 실랑이 끝에 만날 약속을 하고, 어렵게 장소를 정한 그날부터 만날 날을 손꼽으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가슴 아프게 기다리고, 수첩을 확인하고, 달력을 보고, 또 보고, 그날이 되어 아껴둔 셔츠를 입고, 정성들여 구두를 닦고,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두 사람 몫의 커피값을 비는 일은 이제 할 필요가 없다.
깨끗이 씻은 두 손으로 고급한 요리를 차례대로 먹듯, 그런 약속된 형식을 누리는 즐거움은 사라졌다. 우리들은 버려진 고아같이 약속 없는 거리에서 만난다. 우리들은 두 손을 호주머니 깊이 찌르고 거리를 걷다가, 첫눈에 서로 반한다.
우리들은 첫눈에 반하기를, 너무 잘하는 세대. 남자들은 길거리에서 아무 여자나 잡아 강간을 하고 여자들은 잘난 사내를 애태우며, 그 완강한 근육 속으로 천천히 잡혀들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혼음으로 젊음을 달떠보낸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 노상에서 태어나 노상에서 자라고 결국 노상에서 죽는다. 하므로 우리들은 진실이나 사랑을 안주시킬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끝에 끝없이 길을 만들고, 우리가 만든 그 끝없는 길을 간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다. 하므로, 만났다 헤어질 때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타 ¦ 쏘대다가 다시 보게 될 텐데, 웬 약속이 필요하담!― 그러니까 우리는, 100퍼센트, 우연에, 바쳐진, 세대다.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권기만 시인 / 이민 (0) | 2020.06.01 |
|---|---|
| 공광규 시인 / 썩은 말뚝 외 2편 (0) | 2020.06.01 |
| 정희성 시인 /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외 3편 (0) | 2020.06.01 |
| 오세영 시인 / 바람의 노래 외 5편 (0) | 2020.06.01 |
|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3 외 2편 (0) | 202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