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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친구여, 네가 비시적(非詩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에 뜨겁게 으스러진 나의 삶이 있고, 굶주린 식구가 있고 노동이 있고 그리고 억센 팔뚝뿐이다 삽과 망치뿐이다
아니다 친구여, 너의 정의(正義)가 사는 곳 이 푸른 하늘 아래 뜨거운 태양이 있고, 땅이 있고 너와 나 그리고 햇빛 뒤에 패어진 그늘도 있다
친구여,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침묵 뒤의 소란이, 정신 뒤의 육체가, 우정 뒤의 적의(敵意)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한때는 너와 내가 만나 시(詩)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고 정치(政治)를 말하고 자유(自由)를 말했지만 친구여, 30을 넘어 이제는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를 가로막는구나
친구여, 네가 시(詩)를 쓸 때 나는 굶는 식구를 생각했고 네가 시(詩)를 쓸 때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네가 천국(天國)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죽음 뒤에 오는 것을 생각하며 네가 내민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울며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내가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평화
아흔여섯 살 김신묵 권사는 숨을 거두면서 내 죽으면 박수치며 보내달라고 했다 칠순이 넘은 아들 문목사가 잠시 쇠고랑을 풀고 나와 박수로 어머니를 보내고 웃으며 감옥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세상에 이런 말 못할 평화가 있구나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
법정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 돌아온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나는 새장의 새를 풀어놓았다 하늘을 알아버린 탓일까 그 작은 눈에 고인 햇빛이 너무 맑아 새는 외로워 보였다 모든 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도 하늘이 푸르냐고 묻던 그 친구 눈에 패인 그늘이 생각나 하늘을 보다 자리에 누운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햇빛이 너무 맑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학교 가는 길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 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지요 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버린 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 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 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즐거움도 있겠지 생각하며 길모퉁이 돌아서면 찍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의 고함소리 멀어지고 친구가 다닌다는 공장을 지나면 신축공사장 인부들 오락실 근처에선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의 옆모습도 보이지요 무언가 고달파 보여도 정답처럼 엄숙하지 않아서 볼수록 정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교실로 돌아오곤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자신에게 곧잘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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