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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공광규 시인 / 썩은 말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

공광규 시인 /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 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 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흑-하고 운다.

 

 


 

 

공광규 시인 / 마음 산 칡덩굴 끊으러

 

 

땔감이 연탄이나 기름으로 대체되면서

사람이 산에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자

칡덩굴이 나무를 감아 죽이고 있다

 

내가 시골서 지게로 나무 안 한지가

20년이 안 되는데 벌써 칡덩굴이

무성하여 산을 망치고 있다니

 

아찔하다, 그저 신나는

어린 시절말고는 삼십 몇 년이나

내가 키워 온 마음의 칡덩굴

 

천지간 무슨 자취 남겨보겠다며

안달하는 욕심의 철사 줄 끊으러

나, 오늘 마음 산에 들어가 봐야겠다.

 

 


 

 

공광규 시인 / 길을 잃었다

 

 

맛있는 머루와 으름 덩굴을 좇아 다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날이 어둡고

산짐승들은 울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울며불며

길 잃은 것을 후회했던가

맛있는 것에 눈이 멀어

산을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 도심 골짜기에 들어와서

오, 이런 길을 잃었다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거나

쾌락의 토끼 꼬랑댕이만

정신 없이 따라다니다

인생을 조감하지 못한 탓이다.

 

 


 

공광규 시인

1960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1986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말똥 한 덩이』 등과 시론집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그리고 논문집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가 있음.  1회 신라문학대상과 4회 윤동주상 문학대상 수상. 계간 『불교문예』 편집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