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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시인 /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 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 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흑-하고 운다.
공광규 시인 / 마음 산 칡덩굴 끊으러
땔감이 연탄이나 기름으로 대체되면서 사람이 산에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자 칡덩굴이 나무를 감아 죽이고 있다
내가 시골서 지게로 나무 안 한지가 20년이 안 되는데 벌써 칡덩굴이 무성하여 산을 망치고 있다니
아찔하다, 그저 신나는 어린 시절말고는 삼십 몇 년이나 내가 키워 온 마음의 칡덩굴
천지간 무슨 자취 남겨보겠다며 안달하는 욕심의 철사 줄 끊으러 나, 오늘 마음 산에 들어가 봐야겠다.
공광규 시인 / 길을 잃었다
맛있는 머루와 으름 덩굴을 좇아 다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날이 어둡고 산짐승들은 울고 어린 나이에 얼마나 울며불며 길 잃은 것을 후회했던가 맛있는 것에 눈이 멀어 산을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오늘 도심 골짜기에 들어와서 오, 이런 길을 잃었다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거나 쾌락의 토끼 꼬랑댕이만 정신 없이 따라다니다 인생을 조감하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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