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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29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3.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29

 

 

동이 트기 전 아무도 모르게

꼭두새벽을 빠져 나오다가

손에 든 도시락통을

들키고 말았다.

 

얘야, 그쪽 길은 학교로 가는 길이 아니다 늙은 학생차림을 한 채 어디를 가니, 누군가의 음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어머니 나는 이제 더이상 학생이 아니에요 이 지상에서 더이상 무거운 돌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아요 삶가방을 내던지고 싶어요)

 

세상에서 일단 휴직계를 내고

중퇴를 하든가

아니면 눈부신 발로 독학(獨學)을 가든가

 

나는 가방을 캄캄한 강물 속으로 던져 보냈고

풀밭에 누워 도시락통을 새들에게 주었다.

 

강가에서 내가 던진 무수한 돌멩이들이

고스란히 하늘속에 처박혀 있었다.

 

저 아래 대지(大地)에는 내가 처음 찾아가 만진 신록이 있다.

내가 손등 위에 올려놓고 노래시킨 종다리가 있다.

 

저 아래 대지(大地)에는 내가 피해다닌 길이 있고

내가 골라서 다닌 길이 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피해 달아난 길이 있다.

 

보이느냐 살아 있는 벌레를 너는 밟았다.

 

보이느냐 포도잎새들이 바람의 방향을 바꿔버린 후

포도알 하나하나에서 태양은 썩어갔다.

 

(어머니, 나는 지상(地上)에서

책보다는

돌을 읽는 게 편했어요)

 

나는 저 세상에 가서 새로운 신입생이 되고 싶었다.

 

시간은 자꾸자꾸 술을 권했고

드디어 나는 시간을 오바이트하고 어머니의

양수물까지 토하고는

사지를 늘어뜨리리라.

 

나는 이 지상(地上)에다 시인 흉내를 내며 묘비명을 남기리라.

"아, 너무 마셨다 시간을!"

 

(어머니 나는 오늘 학교를 때려쳤어요

거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 어떻게 하련?

 

절망적인 인간들만이

신(神)의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늙은 학생들이 고뇌에 찬 원서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병자(病者) 차림을 하고

낙방을 한 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들은 더 지치거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늙은 할아버지가 내 가슴의 답안지를 읽으며

채점을 매기고 있었다.

 

절망적인 답안지만이 한쪽 곁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나는 샛눈을 뜨고 횔덜린의 답안지를 보았고

게오르크 트라클, 하이네, 구스타프 말러, 바그너,

모짜르트도 곁눈질로 보았다.

오, 지상(地上)에서 일찍 거두어들인 자들.

 

하느님, 저들보다 저는 백번 만번 값없나이다.

 

값이 없다 해도 신성함이 있어야 하거늘!

 

울타리 쪽으로는 양떼, 염소, 노새, 당나귀, 종달새들이 통과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울타리를 열어놓고 지켜서 있었다.

(아, 저분이 바로

백번을 녹여도 상하지 않는 금(金) 같은 분)

(조용히 하라,

저분이 지상에다 번식시켜 놓은 무덤 앞에서

묵상에 잠기도록)

 

언덕을 걸어 올라가자마자

단숨에 뛰어 달려보고 싶은 초원이 나타났다.

나는 거기에서

산양의 허벅다리를 붙잡고 바둥거리는 핏덩이 하나를 받아내고 있는

그 청년의 모습을 다시 만났다.

내가 다가가자 그 모습은 사라졌다.

 

해 떨어진

초원 끝에서 바람처럼 거니는 그 청년의 먼 발취를 또 보았다.

 

주(主)여, 저는 백번 만번 값없나이다.

천번 만번 값없나이다.

날개가 없는 자가 날으려 했나이다.

가장 비천한 자가 삶의 신성함을 훔쳐내어 위로받으려 했나이다

 

"내려가서, 절망하라.

그것이 지상(地上)의 신성함이라."

 

"천상(天上)의 종은 하늘 꼭대기에 매달아 놓았지만

그것의 줄을 끌어당겨 울리는 것은

너희들 지상(地上)의 인간들이노라."

 

한 알의 검은 씨앗이 네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잘 심어 네 몸속에 잎사귀가 무성하게 퍼져가면 때를 알리리라.

네 몸속의 검은 잎사귀들이 가득차 이마로 솟아나오는 날을

신성의 표시로 삼으리라.

 

한 알의 검은 씨앗이 네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30

 

 

얼음 한조각 들고 내 처음 올라온 길 찾아 내려가네.

구름은 신발만 남긴 채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고,

모든 무덤들은 훗날 기억되기 위해서

더 깊고 추운 골짜기 속으로 망각되어 가리.

살아 있는 그대들 또한 잊혀져 가리.

지상(地上)에서 산정(山頂)으로 올라간 오랜 안식자들.

만년을 고요로 채우기 위해

누구나 한번은 오르다 내려오는 본향(本鄕)길.

마지막 날 바라볼 하늘을 누구나 잔등에 조금은 적셔 두고 싶은 것처럼.

그대들, 살아 있는 자들 또한 조만간에 잊혀져 가리.

그토록 오랜 세월 그대를 헤매게 하고 방황하게 한 세상으로부터.

우리 또한 이토록 사랑하고 소비하게 한 세상으로부터 결국은 잊혀져 가리.

삶의 실수는 머잖아 바싹 다가올 상실을

미리 이득으로 계산해 왔다는 것.

헛딛은 발에게는 위로가 필요한 법,

발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나는 잊혀져 갈 필요가 있네.

잊혀져 간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차라리 휴식.

내일의 그대들이 오늘의 나를 죽은 사람이라 부른들 나는 상관치 않으리.

왜냐하면 나는, 우리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실제로 산 듯 죽었으니까.

모든 노래는

기억되기 위해

잊혀질 필요가 있지.

모든 죽음들이

다시 기억되기 위해

저 추운 골짜기를 찾아가 묻힌 것처럼.

이제 잊혀져 가는 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자, 내일의 바람은 내일의 죽음

죽은 자여 휴식자여 안식자여!

강풍의 아들들이여!

발은 이제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미래의 그대들이여!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