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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시인 / 지하도로 숨다
공습같이 하늘의 피 같은 소낙비가 쏟아진다 그러자 민방위훈련 하듯 우산 없는 행인들이 마구잡이로 뛰어 달리며 비 그칠 자리를 찾는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할 여유도 없이 가까운 지하도로 내려가 몇 분쯤 비를 피하기로 했다 계단에서부터 달싹한 무드 음악이 내리깔리는 지하도 비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지하도가 믿음직스럽다 언젠가 그날이 와서 몇십만 메가톤의 중성자탄을 터트린다 해도 사십 일 간의 홍수가 다시 진다 해도 끄떡하지 않을 지하도 나는 느릿하게 지하도의 끝과 끝을 거닌다 검둥개라도 한 마리 끌고 다녔으면 그 참 멋진 산보일 것인데. 슬금슬금 윈도우를 훔쳐보는 나에게 어린 점원들이 들어와 구경하시라고도 하고 어떤 걸 찾으세요 묻기도 한다 각종 의류며 생활용품 그리고 식당에서 화장실까지 거의 완벽한 지하도 그러면 이런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여자 만나 연애하고 아이 낳고 평생 여기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바깥에서 비가 그쳤는지 어떠한지 도무지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 도무지 바깥의 기상을 알 수 없는 여기는 무덤인가 장신구며 말이며 몸종과 비단 옷감이며 씨앗 단지들 그 많은 부장품들을 함께 매장한 여기는 고대인의 무덤인가 지하도의 끝에서 끝으로 한번 더 걸으며 윈도우에 비친 얼굴을 쳐다본다. 창백해진 얼굴, 아아 내가 이 무덤의 주인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아무 점원도 나를 불러세우거나 묻지 않는다. 그래 나는 유령 이제는 비가 그쳤기도 하련만 지상으로 올라가기가 싫다 이렇게 할일없이 걷다가 방금 내려온 친한 친구라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면서 모르는 지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니 감쪽같이 숨어 있고 싶다 사흘을 여기 숨었다가 계단을 밟고 집으로 돌아가보는 재미도 괜찮으리라 전화도 전보도 없이 사흘 간을 아무 연락도 없이 잠적해 버리면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시련가 두 번이나 나를 체포하고 고문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파출소같은 데다 실종신고를 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는 유유히 돌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부활했다 휘황찬란한 100촉 전구가 불 밝히고 늘어선 문명의 무덤을 걷어 차고 나는 솟아올랐다. 들어라 나는 재림예수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믿을 것이다 안 믿을 것이다 아마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아 믿거나 말거나 비를 피해 나는 지하도로 숨은 적이 있는 것이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 시인 / 지하인간
내 이름은 스물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 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 없는 찬사이므로.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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