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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정란 시인 / 공중사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2.

최정란 시인 / 공중사원

 

 

어린 기도가 흙에 잔뿌리 내릴 때

뿌리 아래 긴 공중이 생길 줄 알았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꽃을 피웁시다

 

문 없는 출구와 바닥과 아치형 천정, 긴 바람의 건축물

제 발 밑에 세워진 줄

꽃은 영원히 모를 지라도

 

누군가 비우는 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것이

공중이라는 것은

시간의 내부를 훑고 가는 바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빈자리를 빈 채로 두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다행입니까

 

모래밭에 올라와 죽은 고래 뼈 궁륭처럼

내장을 파낸 거대한 짐승처럼

반원통형 공중이 흙의 빈 자리를 채웁니다

흙의 내부가 텅 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작심하고 기다린 듯

 

바닥없는 시간의 궁륭

아무도 머물지 않고 빠르게 통과해야 하더라도

뿌리가 움켜쥔 삶의 검은 속살이

시간의 바람에 속절없이 밀려나가는 공허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꽃 피는 일에

몰입 합시다

 

뿌리를 뒤흔드는 진동에도, 밤낮없이 달리는 차들 행렬에도

향기로운 침묵과 바람의 예배는

벼랑 위의 뿌리를 다시 흙의 경전에 박아 넣을 것입니다

 

바닥을 뚫고 가는 굴착기 진동에 놀라 떨던 꽃받침도

세상의 진동과 소음에 익숙해지고

뿌리 내릴 깊이가 없어진 뿌리 깊은 검은 바람도

내일 떠나도 미련 없는 삶을 웃으며 견디는 뿌리의 깊이한계선도

무심한 일상이 되겠지만

 

흙도 공중도 서로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 한계를 먼저 설정하고 꽃 피우는 슬픔은 바닥이 없으니

우리는 다만

 

서로 다른 장르 출신들답게

제각기 간절한 기도로 꽃을 밀어 올립시다

고래의 숨처럼 꽃을 피웁시다

거대한 삶의 바다에서 물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몰아쉬듯이

꽃을 몰아쉽시다

 

이따금 분수처럼 쏟아지는 꽃의 불면이

견고한 믿음의 바닥을 꿰뚫고 솟아오르겠지만

꽃의 입구는 당분간 온 몸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가시 한 점 남김없이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꽃의 허공을 뚫고 들어오는 신앙심 깊은 차들

묵음으로 속도를 늦출 것입니다

 

꽃의 십자가에는 아직 가시가 많고

꽃봉오리인 어린 신께서 주무실 시간이므로

대지의 숨구멍으로 드나드는 천사의 날개 고요할 것입니다

 

바람 위에 떠 있는 이 사원은 어떤 장르일까요

꽃은 어떤 장르로 허공의 진화를 거듭할까요

이 허공에서 꽃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사원이 될까요

 

질문과 질문을 끌고

대지의 들숨과 날숨, 길게 교행 할 것입니다

 

 


 

 

최정란 시인 / 위험한 정원

 

 

이 정원에서 꽃 같은 맹세를 했던가요 재의 맛을 나누며 불의 눈물을 훔쳤던가요

 

꽃이 사라지고, 잎이 사라지고, 가지가 사라지고, 뿌리가 사라지고, 뿌리가 빨아 올린 물을 독으로 바꾸는 정교한 기관이 사라지고, 여름하늘이 아슬아슬 사라지고, 나무의 가는 떨림이 사라지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사라지고,

 

세상은 꽃조차 피우지 않는 독으로 가득한데, 협죽도 하늘대는 하늘이 비워진다 독을 지닌 것들은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독을 가진다고, 사약같은 식물성 오후라고,

 

치명적인 것들은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아름다운 것들은 환한 곳으로 숨어든다 푸른 하늘아래 꽃 필 수 없는 꽃의 극약 같은 붉은 목록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꽃나무가 숨어서 자랄까요 꽃나무 몇 그루 베어낸다고, 세상이 꽃나무 몇 그루 만큼 더 안전할까요

 

꽃의 몸에 닿기 전에 전지가위는 떨까요 뿌리를 뽑아내며 삽은 진저리 칠까요 독을 가진 잎 몇 장 깊이 숨기고 싶지 않을까요 실은 제 마음이 더 무서울까요 무엇을 더 베어낼 수 있을지 막막한 맹독성 우울의 꽃나무 가지들

 

이 정원에서 몰락의 낙원을 꿈꾸었던 가요 까닭 없이 수근대는 타인이었던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맹독이 고이는 꽃나무 한 그루씩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치사량의 슬픔을 조금씩 나누어 복용한 것처럼 평생에 걸쳐 자신을 조금씩 죽이는 것을 보면

 

2019『그림나무』 초대시 발표

 

 


 

 

최정란 시인 / 11월

 

 

어떤 시간의 밀렵꾼이 깊이 다녀갔을까

바람이 가볍게 은행나무의 갈비뼈를 통과한다

 

갈기를 다 내려놓은 나무는 더 이상

바람을 따라 내달리지 않고 강을 향해 울부짖지 않는다

 

온순한 가축이 되기는 처음부터 틀려버린 맹수

말이란 말은 모두 뼈 속으로 들여보낸

나무 안의 표범

 

나무의 잇몸에서 뽑혀나간 이빨은

어느 용맹한 꿈의 전사의 목에서 달랑거리며 빛날까

 

나무의 스무 발가락에서 뽑혀나간 발톱은

어떤 돌아올 수 없는 전투에서 전사의 죽음을 지킬까

 

나무의 몸에서 벗겨져나간 모피는

어느 전사의 잔혹한 애인에게 사랑의 전리품으로

입혀졌을까

 

무엇을 찾아서 인지 모르면서 허공을 내달리던

심장이 터질 듯 미친 시간은

어느 바람이 다 거두어 갔을까

 

한 때 청춘이라는 맹수

제 살을 파먹고 제 뼈를 부러뜨리기를 서슴지 않던

철없는 맹수

 

맨 몸 하나로 좌충우돌 사바나를 뛰어다니던 열정은

어느 치밀한 불면의 시장에서

밤의 장신구로 밀거래 될까

 

골똘히 포효하던

황금의 입술을 모두 내려놓은 나무는 입이 없다

 

나무 아래 묻은 비밀은 누설 없이 영원히

비밀이 되고

나무 아래 속삭인 약속은 번복 없이 영원한

약속이 될 것이다

 

계간 『문예연구』 2019년 겨울호 발표

 

 


 

최정란 시인

경북 상주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가 있음.  2008년 부산작가회의창작기금. 2009년 제1회 요산창작기금. 2016년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2019년 제19회 최계락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