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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파르지팔*
태릉 뒷숲 사격 연습장으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외국인들이 찾아온다. 승마로 단련된 몸매와 사파리 차림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음탕한 농지거리. 그들이 신호를 하면 그녀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그녀는 총구 앞에서 누더기가 될 하얀 원반들을 가지고 조준선 정렬대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원반을 하늘을 향해 멀리 날려 보낸다. 원반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솟다가 하늘 한가운데에서 날개를 펴며 갑자기 백조로 변한다. 하늘에서 하얀 날개를 너훌거리며 날아가는 백조들. 그녀는 눈 감으며 성창(聖槍)을 쥔 수호기사가 자기의 날개를 잡고 하늘로 데려가는 꿈을 꾸다 사방의 총 소리에 허공을 짚으며 인공 잔디 위로 곤두박질 친다. 그녀의 노동은 언제나 능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백조와 같이 땅에 떨어진 삶에다 내던지는 화대.
그녀는 다시 원반들을 챙기며 이미 팔아버린 노동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색꽃이 만발한 인공분수대와 인공잔디를 빠져나와 숲 속의 비밀스러운 신전(神殿)으로 들어가 알몸으로 눕는다. 그녀는 위에서 짓누르는 현실의 중량을 고스란히 받으며 눈을 감는다. 그녀가 하늘로 놓아준 백조는 털투성이 팔뚝에 갇혀 있다.
* 파르지팔: 바그너의 기독교적 악곡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聖盃) 수호기사의 이름.
신성한 숲, 문학과지성사, 1994
조정권 시인 / 품
방황하는 혼은 어디다 휴식을 정할까.
멈춰 있는 것이 아닌 움직이는 것들 옆에서.
먼 길을 아직도 고생스레 굴러다니는 돌멩이거나 나뭇잎이거나 그러한 형체(形體)를 가진 움직이는 것들 옆에서.
바람이거나 눈비이거나 아직도 그러한 형체(形體)를 가지고 설렁이는 무형(無形)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무형(無形) 속에서도 설레이며 지속되는 것들 옆에서.
소유(所有)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되는 것들 옆에서 너와 나와 우리가 버리고 버리는 곳에서 만나야 하는 실체(實體) 속에서.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하늘이불
착하고 순한 푸줏간집 아저씨가 죽었다 장의사 아저씨가 지나가던 하늘을 한 자락 찢어내어 이불처럼 덮어 주었다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허공(虛空) 만들기
너의 작품 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년 동안 땀 흘려 돈을 벌어 빈 드럼통을 수천 개 산다. 그리고 인부(人夫)들을 사서 수천 개의 드럼통을 제각기 하나씩 나눠주어 바다가 보이는 도시의 부두까지 굴리고 오게 한 다음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인간의 힘으로 쌓아올릴 수 있는 높이까지 올려가는 것이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간에 층층이 쌓아올린 드럼통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 그것을 다시 이틀이고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간에 하나씩 하나씩 지상으로 내려 하나씩 하나씩 시끄럽게 굴리고 굴리고 가서 변두리 시간(時間)의 공터에다 내다 버리는 것이다. 인부(人夫)들은 전부 시인(詩人)들로 고용하면 어떨까.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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