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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희 시인 / 어떤 저녁의 우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이승희 시인 / 어떤 저녁의 우울

 

 

  어떤 저녁은 아주 잘 차려 먹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마지막 잔고를 털어 미쳤다 싶을 만큼 밥상을 차리지만 근사한 밥상을 보면 밥맛이 뚝 떨어집니다. 밥값도 못하는 주제에. 그럼 어쩌겠습니까, 차려진 밥상이니 그동안 내 몸에 붙어살던 외로움이며, 증오의 독 같은 절망이며 죄 불러다 먹입니다. 아무 말 없이 술도 한 잔 나눕니다. 오늘쯤은 집나간 마음도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붙잡지 않을 테니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 상 차려 주고 문간에 나가 앉았습니다. 오늘은 불안조차 편합니다. 한밤중에 깨어 여전히 잠든 나를 보았습니다. 낯섭니다. 전 어찌하여 여기 잠들어 있는지요.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영혼의 불빛 같습니다. 발바닥이 까만 것을 보니 그 꿈이 그러한가봅니다. 거지같은 생, 내가 밥먹이고 싶습니다. 부디 내게 와서 쓰러지기를.

 

웹진 『시인광장』 2010년 10월호 발표

 

 


 

이승희 시인

1965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97년 《시와 사람》에 〈집에 오니 집이 없고〉당선,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풀과 함께〉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