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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마음의 수수밭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8.

천양희 시인 /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지진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천양희 시인 / 몽산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천양희 시인 / 물결무늬고동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텉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천양희 시인 /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거야?

 

어린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천양희 시인 / 바람을 맞다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