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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지진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천양희 시인 / 몽산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천양희 시인 / 물결무늬고동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텉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천양희 시인 /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거야?
어린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천양희 시인 / 바람을 맞다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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