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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나, 덤으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8.

황인숙 시인 / 나, 덤으로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황인숙 시인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 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 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폴짝 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들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속은 아늑하고 짚단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 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황인숙 시인 / 나를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마세요.

하느님도 그를 달래 실 수 없어요.

 

까실한 얼굴을

절벅거리며 씻다가

(우리에게는 바빌론강도 없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수돗물가에 앉아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 거예요.

 

 


 

 

황인숙 시인 / 나뭇잎 하나에

 

 

가장 너른 하늘을 보기 위하여

가장 너른 땅이 필요한 건 아니다.

 

비온 뒤의 즙 많은 햇살을

빠는 나뭇잎.

그 치켜올려진 입귀에

황혼이 몰려든다.

 

간지러움, 간지러움

(간지러움은 통증)

 

모든 이파리에 바람은 말을 전하니

나는 거기에

귀 기울여야지.

 

 


 

 

황인숙 시인 / 나비

 

 

나비의 심장은 저토록이나 고요하고

유유히

뱃놀이를 하듯 뛰는구나

늘 낮잠을 자는

구름처럼 뛰는구나

이따금 가느스름 뜨는

커다란 눈처럼 뛰는구나

삽시간, 느리게

새벽과 밤과

아침의 그림자와 오후의 그림자를

오게 했다 지우며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살며시 나비를 잡으면

심장이 멎는다, 정오

나비는 만파 시선을 피하려 쩔쩔매고

나도 쩔쩔매며

그를 본다

손끝 사이로 가뭇없이

빠져나갈 것 같다. 비틀어지거나

나비는 날개에 내 지문을 묻히고

화들짝 날아간다

내 손끝에는

반짝거리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나의 맹세

 

 

나는 역경을, 불운을, 고통을

따뜻이 영접하지 않겠다.

 

울음소리로 미루어

까마귀는 참 속깊은 새인 듯싶기도 하지만.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