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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현상(現象)에서 흔적으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9.

조정권 시인 / 현상(現象)에서 흔적으로

 

 

     허공에 맛있는 먹이를 놓아 1천 마리의 새떼를 유인해 들이는 예술을 하고 싶다 ―잭 번햄

 

1970년 김구림(金丘林)은 한국일보사(韓國日報社) 주최 미술전에 초대작가로 선정되어, 전람회가 개최될 경복궁 현대미술관 건물 전체를 흰 광목으로 덮고 칭칭 묶은 다음 남은 천을 현관 앞마당에 파묻어 미술관 전체를 작품화했다. 그의 작품은 출품 26시간 만에 주최측에 의해 도중 철거되었다.

 

1971년 4월 김구림(金丘林)은 왕십리 살곶이다리 경사진 제방의 마른 잔디 위에 거대한 삼각형을 몇 개 설정하고 그 안 부분에만 불을 질러나갔다. 시커멓게 타버린 삼각형의 잔디 부분이 푸른 제방 위에 나타났다. 그의 작품은 새롭게 잔디가 돋아난 이듬해까지 전시되었다. 자연 그 자체가 신선한 캔버스였다.

 

시(詩)여,

시(詩)여,

화가(畵家)들이 마시는 깡소주 같은 시(詩)여.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화상(畵像)을 보며

 

 

화가 한만영(韓萬榮)이 그린 저 사람은

생전의 내 그림자일 뿐이거니

죽은 후 나는

저 사람의 그림자 되어 떠돌리

허상(虛像)이여

허상(虛像)이여

본시 적(寂)이어늘

나 살아 생전 사용하던 이름을 가진 저 사람

죽으면 함께 불태우라 이르리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화해(和解)

 

 

아무 일도 아니고 아무 일도 아닌데

당신을 들여다보면 왜 이렇게 고요해지는가요

왜 이렇게 공손해지는가요

내 마음이 품고 있는 양(羊)을

잠재우려는 조용한 힘

내가 내 스스로 공손해지려는 힘

나는 지금 두 손을 마주 모으며

고요한 시간 속으로 깃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들으시는지요

이렇게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내 마음이 바스락대는 소리를

마음의 손바닥으로

백합을 받쳐들고

고요한 나라 가슴에 임할 때까지

향기의 나라 가슴에 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나는 바스락대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지요

어느 고독한 시간의 품속에서 마련한 보석목걸이를 품고

나는 지금 당신 앞으로 한 발 다가서고 있습니다

풀잎에 스미는 은 스픈 소리같이

촉촉히 어린 미명(未明)의 빛살같이

나의 눈과 귀는 깨어 있습니다

비맞은 나무들이 자정(子正)을 넘어

사방에 보석 같은 향기를 뿌릴 즈음

석조계단을 오르며

정적(靜寂)이란 숨막히는 고요인 것을

내 마음은 정적(靜寂) 속에서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을

당신은 늘 꾸짖으시며 타일러 주십니다

나는 압니다

내 마음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눈떠진 가슴 때문에

나는 다시는 순수해질 수 없다는 것을

울고 싶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 열려진 가슴을 지우며

당신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아직도 소란스럽다고

당신은 타이르시며 근엄한 표정입니다

바위에 가슴을 대고 울면

어깨 위로 찾아오는 묵직한 중량감을

서서히 자리잡혀오는 안정감을

그러나 당신은 늘 입 다물고 침묵하십니다

내 영혼은 당신의 두 팔 안에

속해 있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시간 속으로 내려가

모든 것이 정지된 정적(靜寂) 속에서

다시 한번 불타오르고 싶습니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흑단(黑檀)

 

 

아프리카나 자바 스마트라 말레이반도에서 베어져서 보름을 진흙 방에서 찌고 석달을 그늘에서 말려진 후, 외항선으로 실려오는 흑단(黑檀)의 질서정연한 더미들을 10여년 전 부산 앞바다에서 본 일이 있다. 한결같이 쇠사슬에 묶인 그 거대한 흑단(黑檀)더미들을 Seatrain으로 하역하는 인부들은 흑단(黑檀)을 절대로 바다로 떨구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놈들은 물에 뜨지 않고 차라리 가라앉아 버린다는 것이다.

 

올 봄의 일이다. 우연히 조각가 K의 아뜰리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한 덩이의 흑단(黑檀)과 이 부러진 도끼를 발견한 것은. 흑단(黑檀)의 피질(皮質)은 강철 같아서 도끼로 찍을 때마다 도끼날을 되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놈들은 온몸에다 거부의 독이빨을 숨긴 채 내려꽂히는 도끼날을 물어뜯고 내뱉어버린다는 것이다.

 

백지 위에 별빛을, 민족문학사, 1985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