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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남산, 11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9.

황인숙 시인 / 남산, 11월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황인숙 시인 / 낮잠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이다

이 시간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

 

어떤 사람이 공연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막 향기가 난다, 향기가

사람이기를 멈춘 내가 장미꽃처럼 피어난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린 시간

 

문득,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톡, 톡, 톡톡톡, 톡, 톡!

사람이기를 멈춘 내

영혼에 이빨이 돋는다

아는 이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모두 다 꿈이라고

절세가인 날씨의 바람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황인숙 시인 /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뿌리를 억세게 뻗어

머리를 옥조이고

피를 흡빨고

 

향기 같은 것

잎새 소리 같은 것

가끔 그런 것이나 보내오고

꽃도 잎샏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 뿌리만 억세게 퍼져

혀를 짓누르고

꿈을 지배하고

 

아, 나는

꿈속에서도 쉬지 못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눈길

 

 

발바닥을

퉁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일만 가지 색채의 까망

 

 


 

 

황인숙 시인 /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웃둥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 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 앉는다

 

저 죽지에

볼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

 

 


 

 

황인숙 시인 / 늙은 건달 불루스

 

 

돈은 다 떨어지고

마음은 옹졸해졌네,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구나.

이 공원 저 벤치

저 버스 이 지하철을 헤매는데

개나리 진달래 만발했도다.

하! 공복통처럼

만건곤한 봄날

 

 


 

 

황인숙 시인 / 다른 삶

-이아라 리 감독의 영화 < 종합적 쾌락 >을 보고

 

 

얼굴이 예뻐도

삶이 지루할까?

돈이 많아도

삶이 지루할까?

집안이 무고해도

삶이 지루할까?

 

여일한 삶이 지루해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앞으로 추한 얼굴로 한 번 살아보려고

밋밋한 삶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다

성형수술을 한다.

 

 


 

 

황인숙 시인 / 담쟁이

 

 

만져보는 거야.

네 입술을.

네 입술의 까슬함과 도드라짐.

한숨과 웃음.

만져보는 거야.

 

만져보는 거야.

네 귀, 네 콧망울과 콧등, 눈두덩.

까슬함과 보드라움.

헤아리지 않아,

그냥 만져보는 거야.

네 가슴,

네 등, 네 엉덩이

허벅지와 팔꿈치.

 

만져보면서 가는 거야.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