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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남산, 11월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황인숙 시인 / 낮잠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이다 이 시간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
어떤 사람이 공연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막 향기가 난다, 향기가 사람이기를 멈춘 내가 장미꽃처럼 피어난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린 시간
문득,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톡, 톡, 톡톡톡, 톡, 톡! 사람이기를 멈춘 내 영혼에 이빨이 돋는다 아는 이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모두 다 꿈이라고 절세가인 날씨의 바람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황인숙 시인 /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뿌리를 억세게 뻗어 머리를 옥조이고 피를 흡빨고
향기 같은 것 잎새 소리 같은 것 가끔 그런 것이나 보내오고 꽃도 잎샏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 뿌리만 억세게 퍼져 혀를 짓누르고 꿈을 지배하고
아, 나는 꿈속에서도 쉬지 못한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눈길
발바닥을 퉁겨내듯 가볍게 잡아당긴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아니, 발바닥이 직접 듣는 바삭 소리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하양
끝없이 점멸하는 일만 가지 색채의 까망
황인숙 시인 /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웃둥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 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 앉는다
저 죽지에 볼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
황인숙 시인 / 늙은 건달 불루스
돈은 다 떨어지고 마음은 옹졸해졌네,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구나. 이 공원 저 벤치 저 버스 이 지하철을 헤매는데 개나리 진달래 만발했도다. 하! 공복통처럼 만건곤한 봄날
황인숙 시인 / 다른 삶 -이아라 리 감독의 영화 < 종합적 쾌락 >을 보고
얼굴이 예뻐도 삶이 지루할까? 돈이 많아도 삶이 지루할까? 집안이 무고해도 삶이 지루할까?
여일한 삶이 지루해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앞으로 추한 얼굴로 한 번 살아보려고 밋밋한 삶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다 성형수술을 한다.
황인숙 시인 / 담쟁이
만져보는 거야. 네 입술을. 네 입술의 까슬함과 도드라짐. 한숨과 웃음. 만져보는 거야.
만져보는 거야. 네 귀, 네 콧망울과 콧등, 눈두덩. 까슬함과 보드라움. 헤아리지 않아, 그냥 만져보는 거야. 네 가슴, 네 등, 네 엉덩이 허벅지와 팔꿈치.
만져보면서 가는 거야.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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