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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바람편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9.

천양희 시인 / 바람편지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천양희 시인 / 바퀴

 

 

철물점 지나다

버려진 바퀴를 본다

구르지 않는 바퀴를 보면

명퇴당한 아비들 같아

덜커덕, 숨이 멎는다

한때 신나게 굴러갔을 저 바퀴

바퀴는 굴러갈 때 바퀴인 것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소년은 아직 바퀴의 속력을 모를 것이다

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달려간다

속력은 모두 바퀴 때문이란 걸 모를 것이다

구르는 바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는 것

그것이 바퀴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리고 싶다

 

 


 

 

천양희 시인 / 발 없는 새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바람 속에서 쉰다네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만 쉰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갈 수 없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가면 죽는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 속에서 쉬고 싶다네

발 없는 새처럼 쉬었으면 한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

바람같이 소리치고 있다네

내 발 어디에 있지?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가 없다네

 

 


 

 

천양희 시인 /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 시인 / 배경이 되다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천양희 시인 / 부재

 

 

내집 주소를 기억하지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주소 불명

수취인 불명

나는 지금

행방불명 중.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