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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희안 시인 / 투명한 극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9.

강희안 시인 / 투명한 극지

 

 

  남극의 로스빙상으로부터 들려오는 늑대의 소리를 들어봐요

  눈사태로 흘러내린 거대한 암흑의 시간을 지나

  시푸른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빙붕의 소리를 들어봐요

  사람들이 지상의 설원에서 난파한 얼음에 떠밀렸는지

  크레바스의 행간을 따라 탁상형 빙산으로 운집하고 있어요

  소름끼치도록 푸른 기척으로 남은 황량한 눈밭에서

  노랗게 비틀린 나바호족의 신화가 첫 장을 펼치고 있어요

  차디찬 빙하의 사막을 가르며 날아오른 파리의 소리

  사람들의 어깨 위에 앉아 위독한 사생활을 타전하고 있어요

  귓가에서 파랑파랑 파르릉 무너져 내리는 빙산의 고독과

  나침반이 가리키는 바람의 일대기를 탁본하고 있어요

  사막이 모래의 기억에 바스라져 회오의 일갈에 든다면

  극지는 눈발의 문장으로 남아 투명한 지느러미 키우고 있어요

  쩍쩍 빙진의 파장이 잦아들 때쯤 사람들은 주문에 걸려요

  나바호들은 그 파리를 ‘작은 파도’라 믿고 섬기며

  남극의 로스빙상으로부터 들려오는 혼미한 소리를 받아 적어요

  그들의 영혼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극지, 루스빙하

  가장 성스러운 얼음의 행간을 오독하며 책을 덮어요

  여기에는 도무지 따뜻한 생명의 기척이라곤 없어요

  누군가 멀리 스키를 타고 험한 빙산을 미끄러져 내려갈 때

  크레바스 지대를 뒤덮은 설원 위에 찍힌 발자국 하나

  그 발자국은 매킨리 산에서 내려와 얼음절벽을 거쳐

  멀고 먼 북극점을 향해 뻗친 난독의 길을 가요

  바위와 얼음으로 뒤덮인 밤마다 홀로 꺼내 읽는 무기질의 책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혼돈의 시간 저편으로 사라진

  남극의 로스빙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아득한 소리를 읽어봐요

 

 웹진 『시인광장』 2010년 봄호 발표

 

 


 

강희안(姜熙安) 시인

1965년 대전에서 출생. 배재대 국문과 졸업 및 한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 『거미는 몸에 산다』, 『나탈리 망세의 첼로』와 그밖에  『현대문학의 이해와 감상』, 『석정 시의 시간과 공간』, 『문학의 논리와 실제』 등이 있음. 현재 계간 『시에』·『미네르바』 편집위원 및 배재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