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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1
님은 가시고 꿈은 깨었다.
뿌리치며 뿌리치며 사라진 흰 옷, 빈 손에 움켜 쥔 옷고름 한짝, 맺힌 인연 풀 길이 없어 보름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열은 내리고 땀에 젖었다.
휘적 휘적 사라지는 님의 발자국, 강(江)가에 벗어 논 헌 신발 한짝, 풀린 인연 맺을 길 없어 초승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베갯머리 놓여진 약탕기(藥湯器) 하나 이승의 봄밤은 열에 끓는데,
님은 가시고 꿈은 깨이고.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3
그곳은 길이 아니다. 장님이여 암흑의 허공에 피리를 불어라
명부염라(冥府閻羅)의 귀를 울려라. 깨진 피리여 가도 가도 황토흙 길은 멀고,
멀리 사라지는 상여(喪輿) 소리 요령(搖鈴) 소리, 지어미의 음성은 아스라한데 이슬에 젖은 지팡이여, 육신(肉身)이여,
그쪽은 길이 아니다. 동박새 동박새로 가는 길, 후박나무 후박나무 가는 길, 길은 어디에나 있다.
피리를 불어라 장님이여, 정(情)에 눈 먼 지아비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24
외로운 날에는 피릴 불었다.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개의 구멍은 깨졌구나, 여윈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마주대는 입술과 입술.
피리는 목이 갈(渴)한 자에게만 선율이 된다. 비어 있으므로 비상(飛翔)하는 날개.
외로운 날에는 강(江)가에 홀로 앉아 피릴 불었다. 깨진 육신(肉身)은 비에 젖는데
허무(虛無)의 공간(空間)을 울리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또 바람 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36
그대 손 끝에서 구름이 일고 그대 손 끝에서 비가 내렸다.
부서진 악기(樂器), 혹은 끊긴 금슬(琴瑟), 이승의 금침(衾枕)은 차기도 한데 풀린 현(玹), 퉁기는 낙숫물 소리,
그대 손 끝에서 천둥이 울고 그대 손 끝에서 번개가 쳤다.
부서진 문틀, 혹은 병(病)든 육신(肉身). 긴 밤, 잔 기침 숨도 가쁜데 들창문 두드리는 가을 빗소리.
말로도 글로도 못 닿는 나라, 그대 문전에 빗장 풀려고 밤 새워 두드리는 법고(法鼓)소리, 빈 가슴 두드리는 대문(大門) 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43
새벽 세 시 강물이 강물로 흐르고 바다는 바다로 푸르고 까투리 장끼 곁에 눕고 새벽 세 시, 달빛은 눈썹 위에 쌓이고 은하(銀河)는 귀밑머리 적시고 별빛은 이마에서 꿈꾸는 시간, 세시에 깨어 경(經)을 읽는다.
일(一)은 다(多)이며 다(多)는 일(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니며……
화엄경(華嚴經) 보살십가품(菩薩十佳品) 그 말씀. 아, 가슴으로 내리는 썰물 소리 갈잎 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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