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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0.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1

 

 

님은 가시고

꿈은 깨었다.

 

뿌리치며 뿌리치며 사라진 흰 옷,

빈 손에 움켜 쥔 옷고름 한짝,

맺힌 인연 풀 길이 없어

보름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열은 내리고

땀에 젖었다.

 

휘적 휘적 사라지는 님의 발자국,

강(江)가에 벗어 논 헌 신발 한짝,

풀린 인연 맺을 길 없어

초승달 보듬고 밤새 울었다.

 

베갯머리 놓여진 약탕기(藥湯器) 하나

이승의 봄밤은 열에 끓는데,

 

님은 가시고

꿈은 깨이고.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3

 

 

그곳은

길이 아니다. 장님이여

암흑의 허공에

피리를 불어라

 

명부염라(冥府閻羅)의 귀를

울려라.

깨진 피리여

가도 가도 황토흙

길은 멀고,

 

멀리 사라지는 상여(喪輿) 소리

요령(搖鈴) 소리,

지어미의 음성은

아스라한데

이슬에 젖은 지팡이여, 육신(肉身)이여,

 

그쪽은 길이 아니다.

동박새 동박새로 가는 길,

후박나무 후박나무 가는 길,

길은 어디에나 있다.

 

피리를 불어라

장님이여,

정(情)에 눈 먼 지아비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24

 

 

외로운 날에는

피릴 불었다.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바람 소리.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네 개의 구멍은 깨졌구나,

여윈 손으로

등을 두드리며

마주대는 입술과 입술.

 

피리는

목이 갈(渴)한 자에게만

선율이 된다.

비어 있으므로 비상(飛翔)하는

날개.

 

외로운 날에는

강(江)가에 홀로 앉아

피릴 불었다.

깨진 육신(肉身)은 비에 젖는데

 

허무(虛無)의 공간(空間)을 울리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또 바람 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36

 

 

그대 손 끝에서

구름이 일고

그대 손 끝에서

비가 내렸다.

 

부서진 악기(樂器), 혹은 끊긴

금슬(琴瑟),

이승의 금침(衾枕)은 차기도 한데

풀린 현(玹), 퉁기는 낙숫물 소리,

 

그대 손 끝에서

천둥이 울고

그대 손 끝에서

번개가 쳤다.

 

부서진 문틀, 혹은 병(病)든

육신(肉身).

긴 밤, 잔 기침 숨도 가쁜데

들창문 두드리는 가을 빗소리.

 

말로도 글로도 못 닿는 나라,

그대 문전에 빗장 풀려고

밤 새워 두드리는 법고(法鼓)소리,

빈 가슴 두드리는 대문(大門) 소리.

 

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43

 

 

새벽 세 시

강물이 강물로 흐르고

바다는 바다로 푸르고

까투리 장끼 곁에 눕고

새벽 세 시,

달빛은 눈썹 위에 쌓이고

은하(銀河)는 귀밑머리 적시고

별빛은 이마에서 꿈꾸는 시간,

세시에 깨어

경(經)을 읽는다.

 

일(一)은 다(多)이며 다(多)는 일(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니며……

 

화엄경(華嚴經) 보살십가품(菩薩十佳品) 그 말씀.

아, 가슴으로 내리는 썰물 소리

갈잎 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