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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얼은 강을 건너며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업보
일찍이 만해 스님이 머물러 시심을 닦던 백담사에 머리 못 깎은 중 일해 전 아무개가 유폐되고 그가 서슬 푸르게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일초선사 고은은 유난히 단풍빛도 고운 깊어가는 이 가을에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생각느니 아아 어느 시인 말마따나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열쇠
오오냐, 고장난 자물쇠나 고쳐주마 목에도 잔등에도 팔뚝에도 힘찬 가슴팍에도 훈장처럼 열쇠를 걸고 금수나 강산 삼천리 방방곡곡 가가호호 골목새새 오뉴월 숨찬 개같이 헐떡대며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지폐 한장 받아들고 새끼들 양식도 과자도 사야지 산등성이나마 숨돌리고 들어갈 대문도 열고 들어설 방 한칸도 없어 가난은 더 이상 내 훈장이 아니고 끝까지 열쇠만이 내 것이구나 새끼들아, 세종로바닥 이순신장군처럼 이렇게 칭칭 철갑을 두른 애비가 신기하냐 무서우냐 왜 아무 말 않고 애송아지마냥 눈만 꿈벅대느냐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옹기전에서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점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가 좀 빈 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잘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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