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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0.

장정일 시인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는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 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켱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2002) 중에서

 

 


 

 

장정일 시인 / 삼중당 문고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 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히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 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 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긴 여행』,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중국에서의 편지』가 있다. 1987년 제7회 최연소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