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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소리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1.

천양희 시인 / 소리꾼

 

 

소리 하나로 산을 휘어잡은 새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바람보다 먼저 산을

깨우고 계곡 아래 물살도 산정으로 당긴다 당기듯이

소리친다 소리치며 산그림자 가볍게

놓아버린다 숲속이 숲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산이 속으로 울다니!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새여,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소리 하나로

산을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시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은 시인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몸보다 먼저 혼을

깨우고 한순간을 영원으로 밀어올린다 밀어올리듯이

소리친다 세상 속이 세상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세상이 속으로 울다니!속으로

우는 것들은 소리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시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시여 시 하나로

세상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천양희 시인 / 손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천양희 시인 / 스무 고개

 

 

그가 넘어야 할 고개

그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지요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웬 고개가 그렇게도 많은지요

우이령 넘고 우듬재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박달재 넘고 추풍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웬 고개가 그렇게도 높은지요

새재 넘고 고모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아홉 고개 열 고개 넘었는데

웬 고개가 그렇게도 험한지요

인재 넘고 한계령 넘었는데

이제 다 넘었으려니 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무등재 넘고 불이령 넘었는데

보릿고개 하나 더 남았다고 했지요

보릿고개가 고비라고 했지요

그건 그가 넘어야 할

스무 고개였지요

 

 


 

 

천양희 시인 / 시작과 끝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

참 생생生生하지요.

첫눈이 첫발자국이 첫만남이

또 얼마나 푸릇푸릇합니까.

저 보리밭 저 청솔밭

참 청청하지요.

첫해 첫날이

또 얼마나 새록새록합니까.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

참 멸멸滅滅하지요.

노을이 낙엽이 작별이

또 얼마나 뉘엿뉘엿합니까.

저 서산 저 저녁강

참 냉랭하지요.

가는 해 가는 날이

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

 

 


 

 

천양희 시인 / 신이 내게 묻는다면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천양희 시인 / 썩은 풀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