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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벚꽃 반쯤 떨어지고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1.

황인숙 시인 / 벚꽃 반쯤 떨어지고

 

 

한 소절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벚꽃나무 심장이

구석구석 뛰고

 

두근거림이 흩날리는

공원 소롯길

환하게 열린 배경을

한 여인네가 틀어막고 있다

엉덩이 옆에 놓인 배낭만 한

온몸을 컴컴하게 웅크리고

고단하고 옅은 잠에 들어 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반쯤 나뭇가지에 멈추고.

 

 


 

 

황인숙 시인 / 병든 사람

 

 

몸이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방식을 푼다

풀어야 한다

혼자서

하염없이 외롭게

혼자서.

 

 


 

 

황인숙 시인 / 봄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가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봄날

 

 

`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인숙 시인 / 봄의 꿈

 

 

봄비가 보습처럼

완고하고 무표정한 하늘을 바스라뜨렸다

 

어디론가 가보고 싶지만

그곳이 내게로 온 것도 같다

 

사방 간 데로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속을

사방 간 데로 걸으리

 

땅에 갓 뿌리를 묻은 묘목들도

무덤들도 푸르러지리.

 

 


 

 

황인숙 시인 / 분홍새

 

 

기지개를 켜다가 보았어.

굴뚝위의 야릇한 새.

그게 정말 분홍색인지

그게 막 깨어난 햇남의 장난인지

눈비비고 나니

훌쩍 지붕 너머로 사라졌어

내 말 듣는 거야, 안 듣는거야?

분홍새를 본 것 같다니까.

내 말 듣는 거야, 안 듣는 거야?

갸우둥거릴 것 없어.

무슨 은유인지, 상징인지,

난 분홍새를 보았고

그저 보았다고 말하는 거야.

그저 그뿐이야.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불행의 나비, 행운의 나비

 

 

저기 행운의 나비가 보이네요

팔랑팔랑

세상 좋은 향기란 향기는 다 풍기는 듯하네요

주위를 그 자신의

행운의 빛으로 환하게 밝히네요

먼 빛으로라도 행운의 나비를 보면

우리는 미소짖죠

이리와, 이리 내게로 와, 행운의 나비야

우리는 행운의 나비를 만나고 싶어하죠

 

행운의 나비는 내려앉는 데서마다

듬뿍 행운의 가루를 묻혀 날아가죠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행운의 나비가 저기 가네요

 

저기 불행의 나비가 보이네요

펄렁펄렁

칙칙한 빛깔의 묵직한 날개

주위가 다 캄캄해지네요

 

저리가, 저리 멀리 날아가, 불행의 나비야

우리는 불행의 나비를 피하고 싶어하죠

 

불행의 나비는 내려앉는 데서마다

듬뿍 불행의 가루를 묻혀 날아가죠

우리가 눈을 감고 외면하는

불행의 나비가 저기 가네요.

 

 


 

 

황인숙 시인 / 비

 

 

저처럼

종종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황인숙 시인 / 비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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