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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참는다는 것
세상의 행동 중에 참는 게 제일이라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참기로 했지요 날마다 참으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요 참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살 길은 갈수록 구불텅거리고 살림은 출렁대며 흔들렸지요 누가 고해(苦海)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그때 나는 절벽에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들을 생각했지요 발밑에 밟히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참으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때서야 힘든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힘들게 산다는 것은 힘쓰고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참고 살수록 삶은 더 구비쳤지요 오늘도 나는 인파 속에서 자맥질하지요 힘껏 살고 싶어 힘내고 싶어
천양희 시인 / 첫 꽃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사막에서 몇 십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연꽃 씨앗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늪에서 몇 천 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사람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어디에서 몇 년이나 견뎌야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꽃은 세상이 궁금해서 첫 꽃을 피운다
천양희 시인 / 청사포에서
청사포 앞 바다엘 간다. 부산 아지매 사투리가 생선처럼 튀는 아침 바다의 자리는 생생하게 빛난다 투명한 물 속 저 환한 화엄계! 수평선이 세상을 수평으로 세운다 허공에 넘실대는 갈매기소리 공허하다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흐르는 물이 말하네 수족관에서도 꼬리치는 물고기들 바다로부터 잊혀지고 나는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를 듣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다 나는 덮치는 저 소리. 미친 듯이 나를 살게 하느니 ……
천양희 시인 / 최고봉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천양희 시인 / 추억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볏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천양희 시인 / 친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 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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