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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박은경 시인 / 빨간 인형은 인형을 안고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3.

김박은경 시인 / 빨간 인형은 인형을 안고

 

 

  어리석음이 유행처럼 번질 때였지 아프간, 콩고

  또 다른 어디선가 한 때의 점령군들

  증오와 애국심으로 빨간 인형을 만들었다 했어

  제작법은 간단해서 소녀들을 잡아 힘을 합해

  쩍쩍 갈라놓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풀숲에서 떠는 숨구멍마다 옹이가 되고

  몸 위로 나무껍질 뒤덮이니 한 바람 지나는 사이

  소녀였던 나무토막들 숲길을 뒹군다 했지

  

  인형 귀는 나무 귀, 들을 수 없고

  인형 눈은 나무 눈, 볼 수 없고

  나무 심장은 전처럼 뛸 수 없다 했지

 

  적군의 아이를 낳는 인형도 온통 뻥 뚫려 버린 인형도

  나무로 만든 팔다리로는 사라질 수 없다 했지

 

  인형이 인형을 낳을 때 어린 젖을 물려야 하나

  울기 전에 비닐봉지를 씌워야 하나

  생각조차 멈춰버렸다 했지, 그땐 나무였으니

 

  모두가 견뎌야 하는 지옥으로도 해는 날마다 떠올라서

  아이는 인형을 안고 인형은 아이를 안고

  순정하게 씻은 몸에 잘 마른 새 옷을 입고

  부는 바람 말간 볕에 젖은 머리 말리고 있지

 

  지금 이 순간 이토록 평화로우니 어딘가 어떤 거대한 손이 있어

  빨간 인형과 인형의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는 것만 같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토록 사랑스러우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많이, 영원히

  너를 사랑해

 

웹진 『시인광장』 2010년 8월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업. 2002년《시와 반시》에〈감전〉외 4편을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시집으로『온통 빨강이라니』(문학의전당, 200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