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홍해리 시인 / 그리움을 두고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4.

홍해리 시인 / 그리움을 두고

 

 

가을이 깊어지면

마음의 거문고 줄을 적시다

세상에 귀를 열어 보라

꽃 지고 난 사이 허공길 걸어

내 갈 곳 어디런가

저린 삭신 풀어 놓고

눈뜨고 자며 뒤척이다가

속내 감춘 한줄기 바람

꿈꾸며 가다 숨길 멈춘 곳

시리리시리리 시리다 우는

천지간에 지천인 풀벌레소리

이미 한세상 내디딘 걸음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것이 우리의 밥술인 것을

손톱 반달 만한 그리움도 있어.

 

 


 

 

홍해리 시인 / 그리움을 위하여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 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밤은 시를 쓸 것

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

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 n빛 소쩍새 울음.

 

보리 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삘기풀 찔레꽃의 평활 위하여

이 묵은 시간 거리의 떠남을 위하여.

 

 


 

 

홍해리 시인 / 금강초롱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초롱꽃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홍해리 시인 / 까치와 권총

 

 

꿈속에서 까치가 떼지어 우짖고 있었다

머리맡에 시 한 편이 놓여있었다

까치 몇 마리 날아와 앉아 있었다

시안(詩眼)이 갓난아기 눈처럼 맑았다

동그랗게 빛났다

아기의 손에 이쁜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총을 쏘아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관음(觀音)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화약냄새가 한겨울의 매화 향기 같았다

사람들은 향기를 귀로 맡고 있었다

문향(聞香)이란 말은 그런 것이었다

 

 


 

 

홍해리 시인 / 꽃 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 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 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나는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홍해리 시인 / 꽃 지는 날

 

 

마음에 마음 하나

겹치는 것도 버거워라

 

누가 갔길래

그 자리 꽃이 지는지

 

그림자에 꽃잎 하나

내려앉아도

 

곡비 같은 여자 하나

흔들리고 있네.

 

 


 

 

홍해리 시인 / 나의 시(詩)는

 

 

북소리 한 자락 베지 못하는

 

녹슬어 무딘 칼, 이 빠진 칼

 

그 옆에 놓여 있는

 

네 마음 한 자락 베지 못하는.

 

 


 

 

홍해리 시인 / 낙엽 편지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이 가벼움으로

세월에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生)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평생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

눈썹 위에

 

바람이 잔다.

 

 


 

 

홍해리 시인 / 난잎 질 때

 

 

곧던 잎 점점 휘어지고

검푸르던 빛깔 누렇게 변해

마침내 똑! 떨어질 때

 

저 하늘의 작은 별

깜빡! 하며

마지막 숨을 놓는다

 

광대무변의 세상 점 하나 지워지고

한 순간

눈물 방울 하나 갸우뚱한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지구는 돌고

그렇다, 권위도 순서도 없는

죽음이란 분명한 사실일 뿐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그랬듯이

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손자도 그럴 것이듯

 

눈물도 이슬처럼 햇빛 속에 숨고

자신이 몸을 낮추어

울음으로 찰나의 집 한 채 짓는다.

 

 


 

 

홍해리 시인 / 노을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홍해리(洪海里, 1942년)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우리詩》의 대표로 활동.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 『비밀』 『독종(毒種)』 『금강초롱』 『치매행(致梅行)』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매화에 이르는 길』 과 3인 시집 (김석규 · 이영걸 · 홍해리) 『산상영음(山上詠吟)』 『바다에 뜨는 해』 원단기행(元旦記行) 이 있고, 시선집 『洪海里 詩選』 『비타민 詩』 『시인이여 詩人이여』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