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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황지우 시인 / 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황지우 시인 / 눈 맞는 대밭에서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황지우 시인 / 늙어 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시인 / 들녘에서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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