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4.

황지우 시인 /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황지우 시인 / 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황지우 시인 / 눈 맞는 대밭에서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황지우 시인 / 늙어 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시인 / 들녘에서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