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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가을 고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4.

홍수희 시인 / 가을 고해

 

 

이 가을 나는 몹시 아프다

사랑도 되지 않고 미움도 되지 않는다

 

그대를 온전히 사랑한 적이 없고

그대를 제대로 미워한 적도 없다

 

늘 어정쩡한 거리에 서서

곁눈질만 하였다

나의 삶,

 

차라리 이 가을

그대를 절실히 미워하다가

차라리 이 가을

그대의 발을

내 눈물로 씻기고 싶다

 

저 지는 낙엽처럼

나도 나에게

이별하여 죽어지고 싶다

 

 


 

 

홍수희 시인 / 가을로 가는 편지

 

 

완행 열차처럼

가을은 천천히 지날 일이다

 

엄지와 검지사이의 여유도 없이

지나쳐버린 계절속에는

 

잃어버린 표정과 잃어버린

순수가 버려져 있다

 

슬프면 울기 기쁘면 웃기

사람이 그리우면 그리워하기

 

풀벌레가 앉았던 화단가

돌멩이에도

 

이 가을에는

멈추어 웃음짓는 간이역이길

 

틈새가 있어야 정이 흐르고

틈새가 있어야 사랑이 머물 수 있다

 

 


 

 

홍수희 시인 / 겨울 숲 아시나요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 무리도 숨어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살아요

 

 


 

 

홍수희 시인 / 그네가 있는 풍경

 

 

흔들거리지 않는 그네는

쓸쓸하다

 

외롭고 고단한

우리 가는 이 길에

누군가 등 좀 밀어줬다고

허공에서 그대

잠시 즐거웠단 들

 

너무 탓할 일도

아닌 것이다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닌 것이다

 

허공에서

뒤척여 보지 않고서야

어찌 낮은 데의 평화를

알 수 있으랴

 

바람 속에 퍼덕퍼덕

휘둘려 보지 않고서야

어찌 한 길을 가는

잔잔한 행복을

알 수 있으랴

 

움직이지 않는

그네를 보면 나는 오늘도

뜨거운 손으로 높이

높이 올려주고만 싶다

 

 


 

 

홍수희 시인 /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

 

 

슬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기쁨이 있더군요

 

기쁨을 뒤집어 보니

거기 아픔이 있더군요

 

다시 아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감사가 있더군요

 

이렇듯,

삶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생각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리 보이기도 하지요

 

희망마저

잔인해 보일 때,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