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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하나밖에 없다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양희 시인 / 하늘을 볼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록이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 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천양희 시인 / 하루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 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 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천양희 시인 / 하루살이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가 죽습니다. 하루가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하루의 하루살이가 되기 위해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딥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더 넘게 허물벗기를 합니다. 천 일동안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다 하루살이가 되면 하루를 살다 죽어버립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견디는 하루살이. 그것은 하루살이의 운명입니다.
천양희 시인 / 한 아이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천양희 시인 / 한 자리
바람 불다 비가 와 햇빛이 솔밭 가지로 지나가버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새들은 어디 갔나 네 이름 묻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나를 놓 을? 나를 놓을 어디?
바람 부니 꽃이 꽃자리 살펴보던 때가 그냥 지나가버려 바위 위에 바위처럼 앉아 꽃들은 다 어디 갔나 네 이름 받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내 마음 뿌릴? 마음 뿌릴 어디?
바람이여, 나는 너무 늦게 흔들린다 나도 가끔 세상 빠져나가고 싶은 바람이다 바람을 꽃처럼 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산 자로서 조용히 접혀 있다
천양희 시인 / 한계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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